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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버지 대신 받은 ‘납북자 첫 무공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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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32회 작성일 13-08-0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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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버지 대신 받은 ‘납북자 첫 무공훈장’

최종편집 : 2013-07-01 17:24

[취재파일] 아버지 대신 받은 ‘납북자 첫 무공훈장’ 관련 이미지

서울 송파구 특수전사령부에서 1일 최원모 씨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열렸다. 최 씨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며 북한군과 중공군을 섬멸하는데 공헌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무공훈장을 받은 이는 최 씨가 아닌 최 씨의 아들 최성용 씨였다. 최원모 씨는 북한에 피랍된 납북자였기 때문이다.

납북자무공훈장

6.25 당시 유격 백마부대의 유일한 동력선이었던 북진호의 함장이었던 최 씨는 휴전 이후 남쪽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하지만, ’67년 6월 배를 몰고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최 씨와 함께 북쪽으로 끌려갔던 선원 7명 가운데 5명은 풀려났지만, 최 씨와 다른 2명의 선원은 남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최 씨는 북쪽의 조사과정에서 6.25 당시 유격대 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한다. 최 씨는 이후 북한에서 총살당했다는 얘기가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망 날짜나 경위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납북자 무공훈장_5
가족 납북됐는되도 ‘쉬쉬’ 해야 했던 납북자 가족들

북한으로 끌려간 납북자는 크게 6.25 전쟁 당시 납북자와 전후 납북자, 즉 6.25 전쟁 이후 고기잡이 등을 하다 북쪽으로 끌려간 납북자로 나뉘어진다. 이 가운데 전후 납북자는 정부가 인정하는 사람이 현재 517명이다. 6.25 전쟁 당시 납북자 문제가 비교적 최근에 부각된 데 비해 전후 납북자 문제는 보다 일찍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는데, 납북자 문제가 대북문제의 중요 현안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사실 정부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납북자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쪽으로 끌려간 사람인만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가진 국가가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 중의 하나지만, 우리 정부는 당초 이들을 피해자로 대우하고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납북자들이 혹시라도 북쪽과 연계를 갖고 월북한 사람들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갖고 이들을 대했고, 납북자 가족들은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가족들이 납북되고도 쉬쉬해야 하는 ‘죄인 아닌 죄인’ 생활을 해야 하기도 했다.

이같은 납북자 문제가 우리 사회의 현안으로 등장하게 된 데는 ‘납북자가족모임’이라는 단체를 이끌어 온 최성용 회장의 노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최 씨는 이번에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최원모 씨의 아들로 2000년부터 납북자단체를 결성해 납북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해 온 인물이다. 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북한에 억류된 이상 아버지의 생존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최 씨는 납북자 문제에 무관심한 정부에 경종을 울리고자 활동을 시작했다.

최 씨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최 씨는 정부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곤혹스러운 인물 중의 하나가 됐다. 정부와 대화도 하지만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도 마다않는 최 씨가 7, 80살 되는 납북자 가족들과 거리로 나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십년째 자식의 생사도 알 수 없는 노인들이 거리로 나서면 시위는 피맺힌 절규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정부 청사나 남북회담장 주변에서 이뤄지는 이런 시위로 인해 정부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정부내 일부 당국자들과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 최 씨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 씨를 중심으로 한 납북자 가족들의 이러한 울부짖음이 없었다면, 정부가 납북자 문제에 얼마나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이들의 다소 ‘과격’한 행동방식에 대해 비판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머니 유언 지키는 것이 마지막 소원

최 씨의 어머니는 2005년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의 유해를 찾아 합장해달라’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최 씨로서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는게 마지막 소원이지만, 북쪽 어디인가에 묻혀있을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그의 나이도 환갑을 넘어 61살이니 말이다.

어머니의 유언을 지킬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지만 최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납북자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운명처럼 다가온 납북자 활동은 어쩌면 그에게 맡겨진 책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후 납북자 가운데 처음으로 최 씨의 아버지에게 수여된 화랑무공훈장. 최원모 씨의 6.25 당시 전적에 대한 국가의 평가지만, 최 씨는 납북자 활동에 대한 국가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의 표현으로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납북자 문제의 해결방안이 딱히 보이지는 않지만, 납북자 가족들이 죽기 전에 마음에 맺힌 한을 풀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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