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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님아” “막내야”… 42년만에 얼굴 비빈 형제 눈물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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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98회 작성일 14-02-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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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님아” “막내야”… 42년만에 얼굴 비빈 형제 눈물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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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얼굴 좀 보자” 1972년 서해상에서 조업하던 중 납북된 박양수 씨(왼쪽)가 20일 북한 강원 고성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단체상봉에서 동생 박양곤 씨의 얼굴을 쓸며 오열하고 있다. 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납북자가족모임 제공

[동아일보]

[4년만에 남북 이산상봉]

납북어부 박양수-최영철 씨, 南형제와 포옹


42년 만이었다.

“행님아!”

이마를 맞댔다가 두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고…. 얼싸안고 눈물범벅이 된 두 형제는 도무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이제 테이블에 앉으시라’는 안내원의 말에 겨우 앉았지만 형제는 부여잡은 두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서로 손을 토닥여줬다. 뜨거운 눈물이 형제의 뺨을 타고 흘렀다.

○ 10대에 헤어져 초로에 만난 형

납북자 박양수 씨(55)는 20일 금강산에서 한국의 동생 양곤 씨(52)를 만나 오열했다. 1972년 12월 28일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우려 오대양61호를 타고 바다에 나갔던 형은 초로의 모습으로 동생 앞에 나타났다. 양곤 씨는 3남 1녀의 막내, 양수 씨는 그의 둘째 형이었다.

거제도에서 농번기 일을 함께 거들고 겨울철 땔감을 같이 구하러 다니던 중학생 형은 양곤 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바다에서 납북됐다. 형은 이제 거센 경상도 사투리 대신 북한말을 쓰고 있었다. 양수 씨는 광산에서 반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금색 노력영웅 훈장과 2개의 은색 영예훈장을 꺼내 보였다.

“형님이 어릴 때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추억의 편린을 맞춰가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형님, 할아버지 산소 어디 있는지 기억나요?”

“그 저수지 옆으로 올라가서….”

“그 동네 이름이 중박골이에요. 할아버지 산소 옆으로 국민학교(초등학교) 소풍도 갔었잖아요.”

“맞다, 맞다.”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와 큰형 얘기를 들은 양수 씨는 한동안 말을 잊은 채 한숨만 쉬었다.

손바닥만 한 논을 경작해 입에 풀칠하며 어렵게 생활했던 아버지는 자식의 납북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12년 만인 1984년 세상을 떠났다. 기약 없이 아들을 그리워하던 어머니도 13년 전 눈을 감았다. 누나는 최근 건강이 악화돼 남동생을 만날 기력이 없었다. 형이 부모님 얼굴을 잊었을까 걱정해 양곤 씨가 가져온 아버지 어머니 사진과 묘 사진을 보던 양수 씨는 다시 굵은 눈물을 쏟았다. 양수 씨는 “빨리 통일이 돼야지, 자주 만나자”고 말했다.

○ 6남매가 그리워한 넷째 동생

상봉장 다른 편에서 다른 형제가 한참을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내 동생아, 40년 전 얼굴 그대로구나….”

최선득 씨(71)가 납북된 넷째 동생 영철 씨(61)를 40년 만에 만난 것이다. 1974년 2월 15일 당시 21세 영철 씨는 홍어잡이 어선 수원33호를 타고 백령도 인근으로 나갔다. 북한 해군이 함포를 쏘며 배를 납치할 줄은 그도, 그의 가족도,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충남 청양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 외양 어선을 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납북’이라는 악몽 같은 비보에 4남 3녀의 맏이였던 선득 씨의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국 넷째를 다시 보지 못한 채 1988년, 1998년 차례로 세상을 떴다.

선득 씨가 가져온 부모와 형제 사진을 보던 영철 씨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선득 씨가 “너 수학여행 갔을 때 막 일찍 가려고 했던 것 생각나느냐”고 묻자 영철 씨는 “다 양복 입고 가는데 나만 바지저고리 입고 가니까…”라고 답하며 추억을 더듬었다. 선득 씨가 “헤어질 때보다 살이 더 찐 것 같다”고 하자 영철 씨가 “원수님 덕이에요. 우리가 못사는 줄 알았시오?”라고 되묻기도 했다.

최병관 씨(68)는 6·25전쟁 때 납북된 아버지의 북한 이복동생 병덕(47), 경희 씨(53)를 만났다. 병덕 씨가 북한의 7남매 사진을 보여주자 병관 씨는 “이렇게 사셨으니 외로움이 덜했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지 못했으면 얼마나 외로웠겠느냐”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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