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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에 뱃일 나갔다가 안 돌아와… 42년만에 부르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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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56회 작성일 14-02-2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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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에 뱃일 나갔다가 안 돌아와… 42년만에 부르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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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박양곤(오른쪽)씨가 납북되었던 형 양수씨를 부둥켜 안고 오열하고 있다. 금강산=김주성기자 poem@hk.co.kr

■ 납북 어부 2명도 상봉단에 포함

전시 납북자 가족 3명도 북측 이복형제들 만나

"40년 만에 불러 본다. 행님아!"

42년의 세월은 까까머리 10대 소년을 환갑의 반백 노년으로 바꿔 놓았다. 그동안 생사조차 알 수 없이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게 30년. 동생은 불과 10여년 전에야 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산이 4번이나 바뀌어서야 마주했지만 형제는 자신을 똑 닮은 상대를 금세 알아채고 이내 뒤엉켜 흐느꼈다.

20일 눈물이 홍수를 이룬 금강산호텔에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5쌍의 이산가족도 함께 했다. 전쟁 도중, 혹은 분단체제에서 어쩔 수 없이 북에 끌려간 전시ㆍ전후 납북자와 남한의 가족들이다. 박양곤(52)씨도 그중 한 명이다.

박씨의 형 양수(58)씨는 1972년 12월 28일 서해에서 홍어잡이를 하다 납북된 쌍글이 어선 오대양 61호 선원이었다. 4남매 입에 풀칠할 밭떼기 하나 없던 시절, 양수씨는 열여섯 나이에 배를 탔다. 집안 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좌절되자 가계에 도움이라도 되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뱃일이 형제를 영영 갈라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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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씨가 납북된 뒤 동료들과 함께 라진혁명전적지를 방문해 촬영한 모습. 납북자가족모임 제공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 북쪽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멍에였다. 양곤씨는 "그 고통이야 말로 표현할 길이 있겠느냐. 학교에 다니는 것도, 외국에 가는 것도… 그저 생활 자체가 힘들었다"며 말을 아꼈다.

그 사이 부모와 큰형은 북에 있는 자식과 동생을 가슴에 묻은 채 세상을 떠났다. 오매불망 동생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누이도 악화된 건강 탓에 결국 만남을 뒤로했다. 양곤씨에게 형의 존재는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양곤씨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농사일 거들고, 겨울철에는 땔감을 하러 다니느라 형제끼리 제대로 장난치고 놀 시간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양수씨는 그런 동생을 안심시키려는 듯 이날 흰 봉투에 담아 온 선물명세서와 훈장 3개를 내보이며 "당의 배려를 받고 잘 산다"고 했다.

최선득(71)씨는 반대로 40년 만에 북에서 온 동생 영철(61)씨와 재회했다. 수원 32호의 선원이던 그 역시 74년 2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홍어잡이를 하던 중 북한 함정의 포사격을 받고 끌려갔다. 선득씨는 "넷째 동생인 영철이는 외양어선을 몇 번 타면 병역도 면제되고 취업에 도움이 된다며 서울로 상경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학업을 이어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영철씨의 피붙이는 맏이인 선득씨를 비롯해 6남매가 전부 살아 있다. 지난 주말에도 한자리에 모여 영철씨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줄지 상의했다고 한다. 영철씨에게 선물한 '태엽시계'도 북한에는 배터리가 귀하겠다 싶어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조카 용성(43)씨가 삼촌에게 쓴 편지에는 6남매가 살아 온 과정과 명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새 식구들이 누구인지 등 남녘 가족의 소소한 일상과 영철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북에서 결혼한 영철씨는 이제 아들 1명, 딸 2명을 둔 가장이 됐다. 두 형제는 이날 동네 감나무와 수학여행 등을 주제로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임태호(71)ㆍ최남순(65)ㆍ최병관(68)씨 등 전시 납북자 가족 3명도 아버지가 북쪽에서 낳은 이복형제들과 해후했다. 하지만 최남순씨는 이복형제들이 건넨 아버지 사진을 받아 들고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고 허탈해 했고, 북측 가족들도 "섭섭해서 어떡하느냐"며 울먹였다. 어색한 분위기는 다행히 "이왕 이렇게 된 거 의형제라 생각하고 상봉을 같이 하자"는 최씨의 제안으로 훈훈하게 정리됐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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