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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大陸)에서 키운 꿈, 못 이루고 ★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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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강민
댓글 0건 조회 345회 작성일 21-09-09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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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仁祖)의 아들 소현세자묘 ‘소경원(昭慶園)'
볼모의 쓰라린 경험을 승화(昇華)시키지 못한 비운의 세자(世子)

조선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에 대해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면목(幎目:염습(殮襲)할 때 시신의 얼굴을 싸는 덮개)으로 얼굴 반쪽만을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우상, 잠들지 못하는 역사 조선왕릉Ⅱ, P57]

인조 14년~15년(1637년 12월~익년 1월) 후금(이후 靑)의 태종 홍타이지에 의한 조선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소현세자 일행은 중국 심양(瀋陽)에서 1645년까지 8년간 볼모로 보내다 귀국했으나, 부왕(父王-仁祖)의 냉대 속에 귀국한지 2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毒殺說)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소용 조씨역을 열연한 배우 김연주.ⓒJTBC△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소용 조씨역을 열연한 배우 김연주 ⓒJTBC

이와 관련, 광해군과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JTBC 주말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작가 장하연, PD 노종찬)」이 지난 2013년 3월부터 9월까지 방영되었는데, 조선 왕조의 3대 악녀(惡女)라고 일컬어지는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昭容 趙氏)(? ~1652년:효종2년 12월 사약받고 자결, 딸 효명옹주(孝明翁主), 장남 승선군(崇善君), 차남 낙선군(樂善君)은 자신의 야욕(野慾)을 이루기 위해 인조를 움직여 소현세자를 독살시키고 세자빈(世子嬪) 강씨를 음해(陰害)했다는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었다.

드라마에서 소용 조씨역에 김현주, 인조역에 이덕화, 소현세자역에 정성운, 세자빈 강씨역에 송선미 등 다수의 배우들이 출연했었다.

‘문장의 검객(劍客), 단문(短文)의 예술, 한국어의 발’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김훈(金薰)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처들어 오는 후금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 조정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중 주전파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장렬히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1561~1637년)의 동생)과 주화파 최명길(崔鳴吉,1586~1647년)간 말과 말의 싸움 즉, 김상헌이 이르길 “몸이 성안에 갇혀 있으니 글로써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진데, 창검(槍劍)이 어찌 글과 다르며, 몸이 어찌 창검과 다르겠는냐,(P121~122)” 에 최명길은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戰)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守)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和)가 아니라 항(降)이오,(P142)”라며 명분(名分)과 실리(實理)를 놓고 극명(克明)하게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서날쇠가 눈위에 끓어 앉아 김상헌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상헌이 땅에 엎드려 맞절로 받았다. 예조판서의 머리와 대장장이의 머리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P232]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산성에 갖힌 조정은 무기력(無氣力)했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의 고통은 물론, 성(城)밖에 임금의 격서(檄書)를 내보낼 사람이 없어 당시의 천민(賤民)출신 대장장이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했던 참담(慘憺)함을 그리고 있다. 최명길이 항복(降伏)문서를 작성할 때 김상헌이 뛰어들어 갈기갈기 찢고 통곡(痛哭)하면서 말했다. “명망(名望)있는 선비의 아들로 어찌 이런 것을 할 수 있소?” 하니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주워 맞추며 말했다. “대감은 찢으니 나는 주워 맞추리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치욕(恥辱)의 항복은 이뤄졌으며, 김상헌은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부쉈다는 혐의를 받고 예순아홉의 노구(老軀)로 청의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읊은 시가 유명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냐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 김훈은 영화 시사회에서 “내가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영상으로 잘 표현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싸이런픽쳐스, 인벤트스톤△ 김훈은 영화 시사회에서 “내가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영상으로 잘 표현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싸이런픽쳐스, 인벤트스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동명(同名) 영화(제작 싸이런 픽쳐스, 인벤트스톤, 배급 CJ엔터테인먼트사)가 지난 2017년 10월 개봉(開封)했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삼전도의 굴욕(屈辱)을 맞이하기까지 47일간의 이야기를 다루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치욕(恥辱)을 참고 항복(降伏)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 ‘최명길’과 치욕을 견디고 사느니 끝까지 항전하여 죽음을 택하자는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의 대립, 그 사이에서 번민(煩悶)하는 인조의 갈등(葛藤)을 다룬 영화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劣勢)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包圍)된 상황으로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尖銳)하게 맞선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최명길(이병헌 역)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상헌(김윤석 역)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 역)의 번민(煩悶)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壓迫)은 더욱 거세지며,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영화 OST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담당했고, 사물놀이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국악인 '김덕수' 도 감수역(監修役)으로 참여했다. 원작자인 소설가 김훈은 시사회(試寫會)에서 “내가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영상(映像)으로 잘 표현했다”고 만족감을 표했으며 “작가인 내가 작품 뒤에 감추어 둔 메시지를 감독(監督)이 끄집어 내 언어화하는 것을 보고 ‘들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해 긍정적(肯定的)인 평가를 했다. 

△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 인조의 즉위를 위해 병나라 사행사로 북경을 다녀왔다ⓒ주니어김영사△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 인조의 즉위를 위해 병나라 사행사로 북경을 다녀왔다ⓒ주니어김영사

우리에게 조선시대 절친(切親)한 우정의 표상(表象)으로 알려진 「오성(鰲成)과 한음(漢陰)」에서 한음 이덕형(李德馨,호 竹泉,1566~1645)이 1624년(인조 2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명(明)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인조에 대한 고명(告命)과 면복(冕服)을 주청(奏請)하는 사행사(使行使)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기록을 한글로 남긴 것이 「죽천행록(竹泉行錄)」이다.

이 행록은 130쪽의 본문과 11쪽의 방문으로 이루어졌으며, 본문 가운데 82쪽은 사행기록이고, 나머지는 사행 이후 별세하기 전 까지 죽천의 행적을 기록한 부문이다. 여기에서 사행록의 문헌적(文獻的) 가치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조선 왕조와 사대부(士大夫)들이 그렇게도 존명(尊明)으로 사대(事大)하던 명나라의 관리들에게 천대(賤待)를 받는 장면은 참으로 서글픔을 넘어 민족적 분노(憤怒)까지 일어나게 하고 있다.

즉, 이덕형이 자금성(紫金城) 길바닥에 엎드려 명나라 고관을 만나기를 청하는 장면에서 “공(公)이 또 길가에 엎드려 손을 묶어 부비니 모두 불쌍히 여겨 칭찬하기를 조선에 충신(忠臣)이 있도다.하고 내일 도찰원(都察院-명나라 감찰기관)으로 오라.”하니 공이 무수히 사례하고 관에 돌아와 앉아 파루(罷漏: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북소리)를 기다려 마을밖에 가 떨면서 대령하며 곡절 끝에 고위 관료를 만나게 됐으나, 관아(官衙)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섬돌을 붙들고 애원한다. 한 대신이 갑자기 소리질러 꾸짖되 “변방(邊方)의 적은 나라 신하가 우리의 존위(尊威)를 범하랴. 들어 내치고 문을 닫으라.”하자 공이 울며 빌며 가로되 “대조 모든 대인들께선 적선(積善)하소서” 뇌물(賂物) 공세와 애원 끝에 인조의 즉위 승인을 받고, 면류관(冕旒冠)과 곤룡포(袞龍袍)를 받는 순간에도 앞과 뒤에 용과 호랑이를 그려넣고 해와 달이 없는 곤룡포로 명의 관리들로부터 조룡(嘲弄)과 횡포(橫暴)를 당하는 치욕적(恥辱的)인 장면이 묘사(描寫)돼 있다.[동아일보 2001년 5월 9일, ‘죽천행록’ 한글 필사본 발견 記事]

이어, 1623년(광해15년)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李倧)1595~1649년)는 친명배금(親明拜金) 정책으로 일관하다, 즉위 3년 후인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후금(後金)의 홍타이지(靑 태종)의 침략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사투를 벌리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씻을 수 없는 굴욕(屈辱)을 당하였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던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나중에 處刑) 등과 수 십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인질(人質)로 잡혀 북풍이 부는 한겨울에 황량(荒凉)한 대지를 몇날 며칠을 거쳐 심양(瀋陽;後金의 수도)에 도착, 노예로 팔려가는 또 한번 이(異)민족에게 치욕(恥辱)을 당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의 주자학(朱子學) 지상주의가 노론(老論)의 집권(執權) 명분이 되면서 김상헌의 절개(節介)는 추앙받았으며, 그의 가문 또한 세도(勢道)가문으로 영달(榮達)하기도 했는데, 김상헌이 생전에 직접 지은 묘비명(墓碑銘)에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지성은 금석에 맹서하고 대의는 일월처럼 걸렸네
천지가 굽어보고 귀신도 알고 있네 옛것에 합하기를 바라다가
오늘날 도리어 어그러졌구나 아, 백 년 후에 사람들
내 마음을 알겠구나“
△ 중국 심양에서 1636년 후금을 건국한 靑나라는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며 1912년까지 중국을 통치하여 거의 300여 년을 존속, 근.현대 중국을 지배했다. 일본 제국이 중국을 침략하여 1932년에 만주국을 세워 마지막 ‘선통제(宣統帝.푸이)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일본의 괴뢰국으로 전략하다 1945년 소련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필자의 북경 자금성(紫禁城) 태화전(太和殿:황제가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 답사 촬영 영상 캡쳐.ⓒdailiantv△ 중국 심양에서 1636년 후금을 건국한 靑나라는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며 1912년까지 중국을 통치하여 거의 300여 년을 존속, 근.현대 중국을 지배했다. 일본 제국이 중국을 침략하여 1932년에 만주국을 세워 마지막 ‘선통제(宣統帝.푸이)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일본의 괴뢰국으로 전략하다 1945년 소련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필자의 북경 자금성(紫禁城) 태화전(太和殿:황제가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正殿) 답사 촬영 영상 캡쳐.ⓒdailiantv

조선 왕조에서 세자(世子)는 다음 대통(大統)을 잇는 예비 주자(走者)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순간에 왕권(王權)을 잃어 버릴 수도 있었던 예가 있다. 즉,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년), 인조(仁祖)의 맏아들 소현세자(李汪,昭顯世子,1612~1645년), 영조(英祖)의 둘째아들 사도세자(思悼世者:1735년~1762년)로 이들 중 소현세자는 권력의 암투(暗鬪) 특히, 아비인 왕에 의해 희생(犧牲)된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미개하다고 여긴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靑)나라는 조선 왕조와는 너무나 달랐다.

2대 태종 홍타이지가 1643년 9월에 죽자 동생인 ‘도르곤(睿親王)’은 섭정(攝政)을 통해 형의 여섯 살 난 아들인 순치(順治)의 제위(帝位)를 뺏을 수 있었으나, 자기를 낮추고 조카 순치를 잘 보좌하여 청이라는 새로운 제국(帝國)을 탄생할 수 있는 기초(基礎)를 만들었다. 순치의 아들이 그 유명한 강희대제(康熙大帝:청의 4대 황제, 재위1661~1722년)이다.[도올의 중국일기Ⅳ. P167]

소현세자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용골대(龍骨大:후금의 장수, 조선침략때 선봉장)에 이끌려 한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전쟁으로 인해 적군에 의해 수 많은 백성들이 당한 참상(慘狀)을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心情)의 표현이다. 소현세자와 후금의 도르곤은 1612년 스물다섯 살 동갑으로 한 사람은 대륙을 가슴에 품은 사람, 한 사람은 망국(亡國)의 속박(束縛)에서 풀려나기만 소망(所望)하는 사람으로 대륙에서 만나게 된다.

영의정 김류(金瑬,1571~1648년)가 말 잔등에 거만스럽게 앉아 있는 용골대에게 다가갔다. “내 딸 아이가 포로로 잡혀 있는데 속바치고 돌아오게 해주면 천금을 주겠소.” 이때 김류의 첩실(妾室) 딸이 후금군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로부터 후금군에 잡혀 있는 포로들의 속환(贖還) 값이 뛰어올랐다. 무슨 말인지 몰라 용골대와 마부대(馬夫大)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을 것을 깨달은 김류는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壽,?~1653년,병자호란때 청나라 역관 노릇을 하며 금의환향하여 권세를 등에 업고 폐악 저질러)를 껴안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제 판사(判事)와 우리는 한 집안이니 공이 차마 거절하겠는가? 내 딸이 속바치고 돌아 오는 일에 힘써주시오.” 정명수가 김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소롭고 어이없다는 표정이다.{이정근, 소현세자, P61]
조소(嘲笑)를 흘리며 정명수가 돌아섰다. 김류가 정명수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명수는 뿌리치고 말에 올랐다. 종종걸음으로 정명수의 말고삐를 잡은 김류는 애걸(哀乞)하는 모습으로 매달렸다. 한심한 영의정(領議政)이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일국의 영의정이 조국을 배반(背反)한 역관에게 첩실(妾室)의 자식을 구명하고자 공이라며 아부를 하다니, 간도 쓸개도 없다. 이런 소인배(小人輩)가 조선의 재상(宰相)이니, 후금에게 치욕(恥辱)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歸結)이었다.{이정근, 소현세자, P61]
△ 중국 심양에 있는 심양고궁 황제의 집무실인 ‘대정전’ 내부,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흑칠금자편액이 걸려 있다.ⓒ도올 김용옥△ 중국 심양에 있는 심양고궁 황제의 집무실인 ‘대정전’ 내부,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흑칠금자편액이 걸려 있다.ⓒ도올 김용옥

후금군의 침략에 강화도(江華島) 수호를 맡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인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金慶徵,1589~1637년)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버리고 도망했는데, 협수사[(協守使:남한산성 항전 당시 성중(城中)의 사대부를 통솔하면서 북성(北城)의 수비를 돕도록 한 전시관직(戰時官職)] 유백증(兪伯曾:1587~1646년)은 권력 핵심을 향해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신이 전하(殿下)의 뜻을 살피건데, 전하는 처음은 있으나 마지막이 없습니다. 반정(反正)을 일으킨 것은 부귀(富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임금과 신하 모두가 오직 부귀를 일삼고 있습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보건데 권신(權臣)만 있고 임금은 없습니다” 인조를 향한 비수(匕首)이다.

1천500자에 이르는 장문(長文)의 상소이다.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김경징 등에 대한 상소로 결국 그는 처형됐다.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直言)한 유백증은 탄핵(彈劾)했다는 이유로 파직(罷職)됐는데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등 양사가 상소했으나,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연달아 상소하자 마침내 김류는 삭탈관직(削奪官職)된다. 한마디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필자는 몇 년전 늦가을 중국 심양(瀋陽)에서 승용차를 빌려 단동(丹東)까지 왕복 약 7시간을 황량(荒凉)한 북방의 드넓은 평야를 달리면서 4백여 년전 우리 선조들이 「못난 나라(조선) 못된 임금」을 만나 1천700리길을 두달여에 걸쳐 걸었을 것을 생각하며 진정 마음으로 울었었다. 삭풍(朔風)이 부는 한겨울에 신발이나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행장(行裝)이었을 것이며, 후금군의 말굽과 채칙아래 계속되는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병을 얻고 동사(凍死) 또는 객사(客死)하는 이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 존명양이(尊明攘夷)는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정치 철학(哲學)이고 신앙이었다. 명나라의 그림자를 붙잡고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을 꿈꾸었으며, 명나라가 세계의 전부였다. 당시 사대부들의 국제(國際) 감각을 ‘우물안의 개구리’로 만든 것은 성리학(性理學)이며 이것이 조선의 불행이었고, 백성들에게는 고난(苦難)의 연속이었으며, 종국(終局)에는 이(異)민족에게 포로(捕虜)와 천대로 전락(轉落)하는 비참한 역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망국(亡國)의 한(恨)을 안고 2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4월까지 두 달여에 걸친 힘든 여정으로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삼학사 등이 심양관(瀋陽館)에서 볼모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지혜로웠으며 한시도 「조선의 꿈」을 놓지 않았다. 심양에서의 생활은 ’오랑캐‘라고 비하한 후금(後金)의 발전상과 서양문물 등을 접하면서 조선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이 어느때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하고 후금 고위 관리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자립(自立)과 자강(自强)을 실행해 나갔다. 특히 노예(奴隸)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이 노예시장에서 천대(賤待)를 받는 것을 세자빈 강씨와 함께 구제(救濟)해 이들과 함께 농토를 개간하고 농장을 경영하며 수확물을 후금에 되팔아 이익을 남기기까지 했다.

포로 중에 돈을 주고 환속(還屬)하여 조선으로 돌아 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부모와 지아비, 자식들에게도 천대(賤待)를 받아 어떤이들은 문중에서 쫓게 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끊었던 슬픈 사연을 낳기도 했다. 얼마나 비아냥거렸으면 ‘화양년’이란 비속어(卑俗語)까지 유행하였을 뿐아니라, 이들이 낳은 자식들을 ‘호로(胡虜)자식-후레자식’이라고 놀림을 받기까지 했으니 후금군의 침략으로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고통과 휴유증(後遺症)이 심각했는가를 반증(反證)하고 있다. 여기에 그 못난 나랏님이 이들을 홍제천의 냇물에 목욕시켜 여론(與論)을 잠재우려고 한 웃지 못할 하책(下策)까지 했다.

△ 만리장성은 산해관(山海關: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외교사절은 요동의 사행노정(使行路程)을 경유하여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북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통과해야 했다.) 각산장성(角山長城)과 연산산맥을 넘어 서쪽 사막의 감숙성(甘肅城) 가욕관(嘉峪關)까지 약 6,400㎞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인공 건축물로 수 많은 인민과 소수 이민족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필자의 북경 북쪽 팔달령장성(八達嶺長城) 답사 촬영 영상 캡쳐ⓒdailiantv△ 만리장성은 산해관(山海關: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외교사절은 요동의 사행노정(使行路程)을 경유하여 중국의 수도인 연경(燕京,북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해관을 통과해야 했다.) 각산장성(角山長城)과 연산산맥을 넘어 서쪽 사막의 감숙성(甘肅城) 가욕관(嘉峪關)까지 약 6,400㎞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인공 건축물로 수 많은 인민과 소수 이민족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필자의 북경 북쪽 팔달령장성(八達嶺長城) 답사 촬영 영상 캡쳐ⓒdailiantv

삼전도에서 후금에 당한 굴욕과 두려움, 강박관념(强迫觀念)에 사로잡힌 인조로부터 냉대(冷待)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는 청에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창구(窓口) 역할을 하면서 조선인 포로 도망자들의 송환(送還)문제와 청이 조선에 대해 병력, 군량, 선박 등의 무리한 요구를 슬기롭게 처리하는 등 조청(朝靑)관계를 조정하는 수완(手腕)을 발휘했다. 그가 영구 귀국하기 직전인 1644년 가을 예수회 소속의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서양 역법(曆法)과 과학 관련 지식을 전수(傳受)받았다. 소현세자는 북경 체류 두 달만에 볼모에서 풀려나 1645년에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북경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명청(明靑) 교체기의 국세정세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불운한 세자였다. 처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귀국 후 「잠도역위(潛圖易位)」 즉, ‘세자가 물밑에서 왕위를 바꿔 오르려 한다.’라는 모함(謀陷)과 시기(猜忌)로 인해 아버지 인조로부터 의심과 냉대를 받다 귀국 2개월만에 34세 나이로 급사(急死)하고 말았으며, 야사(野史)에는 인조가 벼루를 던져 머리를 맞은 소현세자가 혼절(昏絶)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의 이름처럼 「밝게 빛날-소(昭), 나타날-현(顯)』처럼 죽은 뒤에야 후세(後世)에 불려지는 세자, 소현이었다.

소현세자 일가는 풍비박산(風飛雹散)되면서 원손(元孫)인 세자의 맏아들 경선군(慶善君,石鐵,李栢1636~1648년)이 세손(世孫)에 책봉되지 못하고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1619~1659년)이 세자에 책봉되는 이변이 발생했으며, 둘째 경완군(慶完君,石麟1640~1648년), 셋째 경안군((慶安君,石堅:李檜164~1665년) 등 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는 데, 첫째와 둘째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셋째만이 살아 남았다. 또한, 세자빈 강씨[(후에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는 심양관에 대한 조선 조정의 물적 지원이 한계에 다다르자 세자빈이라는 신분을 접고 과감히 경제 전선에 뛰어들어 현지에서 농업과 무역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왕족들과 교류했고, 심양관은 조청(朝靑) 외교 창구(窓口)로서의 기능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속환되어 그리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세자빈의 행보는 소현세자의 입지(立志)를 강화시킴으로써 장차 자신의 권좌를 찬탈(簒奪)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시아버지 인조의 의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금의환향(錦衣還鄕)했던 소현세자는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고, 강빈(姜嬪)은 인조로부터 저주(詛呪)와 독살(毒殺) 기도라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너울을 뒤집어쓴 채 1646년 9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 소현세자 가문도 멸문(滅門)의 길을 밟았다.

막내 석견(石堅)은 삼촌인 효종(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뒤 9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1656년 석방이 되는데 나이 겨우 13살이였다. 귀양지에서 돌아와 경안군이라는 봉작을 받고 청나라를 오고 가는 사신으로 활약 했으며 임창군과 임성군 두 아들을 남기고 1665년 22살 나이에 병으로 일찍 죽었다. 그후 숙종 6년인 1679년 경안군의 두 아들은 역모에 휘말렸지만 숙종은 다행히 사사하지 않고 군부인 허씨와 함께 아버지 경안군이 귀양갔던 제주도로 두 아들을 귀양 보낸다. 숙종은 경안군의 6촌형이다. 1684년 5년만에 석방이 되어 돌아 오지만 어머니 군부인 허씨가 곧 병으로 죽는다.

차남 임성군은 큰아버지 경선군의 양자로 입적하여 적통을 이으려 했지만 병으로 후사없이 죽게 된다 다행히도 큰 아들 임창군에게는 밀풍군(密豊君)과 밀남군(密南君)과 밀원. 밀천. 밀본, 밀운 6남 5녀를 두었다. 그들은 소현세자의 하나 뿐인 혈육으로써 보위를 넘 보거나 비관하기 보다는 종친으로 몸가짐을 조심하였기에 정1품까지 받았으며 홀어머니에게 효를 다 했다고 전한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가 영조를 폐위시키고 밀풍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소문과 함께 봉기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장남 밀풍군은 영조 5년 왕명에 의해서 결국 자결하게 된다. 영조는 신하들의 끝없는 주청에도 불구하고 밀풍군의 재산을 몰수하지는 않았지만 후손들이 많이 죽었다고 전 한다. 이후 차남 밀남군(이감:李境)이 경선군에게 입적하여 오늘날까지 소현세자의 적통을 이어 오고 있다.

△ 심양에서 귀국 후 2개월만에 별세한 소현세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입구에서 2km안쪽 외딴 곳에 묻혔다, 이곳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다른 왕릉에 비해 출압이 자유롭지 못하다.ⓒ문화재청△ 심양에서 귀국 후 2개월만에 별세한 소현세자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입구에서 2km안쪽 외딴 곳에 묻혔다, 이곳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다른 왕릉에 비해 출압이 자유롭지 못하다.ⓒ문화재청
『승정원(承政院)일기』에는 1646년 2월 7일 인조와 김자점(金自點,1588~1651년)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당시 인조는 강빈이 소현세자의 장례를 치룰 때 하루에 두 차례 녹두 미음 한 종지만 먹고, 저녁에는 그마저도 먹지 않았다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몰래 여종의 밥을 김치와 함께 먹고 따로 불을 지켜 음식을 해먹었다며 괘씸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자점은 장례가 끝나자 그녀가 옷에 남색 물을 들였다며 괴이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혼군(昏君)과 간신(奸臣)이 그렇듯 한통속이 되어 강빈을 파렴치(破廉恥)한 인물로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해 2월 29일, 인조는 강빈의 형제인 강문성(姜文星,1603~1646년)과 강문명(姜文明,1613~1646년)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인조실록 47권(인조 24년(1646년) 2월 9일에는 세자빈 강씨에 대해 대신들과 세자인 봉림대군이 성급히 처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주청(奏請)했으나, 인조는 화를 내며 불편한 삼가를 내비치며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구추강칭이군상지자, 차비모욕이하?)- 개00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조는 강빈을 '개00같은 것' 이라고 칭하였고 이후 마음을 바꿔 강빈을 폐출하여 사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3월 15일에는 드디어 강빈을 사가(私家)로 내쫓은 다음 사약(賜藥)을 내렸다. 세자빈의 죽음에 신하들과 백성이 동요하자 다시 여죄를 만들어 70살에 이른 강빈의 노모 신예옥(申禮玉)을 끌어내어 형장을 가한 후 죽이는 잔혹함까지 보인다. 참으로 통탄(痛歎)할 역사의 기록이다

당시 강빈이 탄 흑색 가마가 창경궁 선인문(宣仁門)을 나가자 남녀노소가 길거리에 모여들어 호곡(號哭)을 하며 뒤따랐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의 번영을 꿈꾸던 강빈은 그렇듯 억울한 폐서인(廢庶人)으로 죽임을 당한 뒤 남편과 떨어져 강씨 문중의 선산인 광명시(光明市) 노은사동 구름산 언덕에 묻혔는데 숙종(肅宗) 44년(1718년) 신원이 회복되어 ‘민회빈(愍懷嬪:슬품을 위로한다.)’으로 그녀의 묘소는 소현세자와 함께 고종(高宗) 7년(1870년) ‘영회원(永懷園:사적제357호)’으로 높혀 부르고 있다. 아버지인 인조는 인열황후(仁烈王后:1594~1635년,강원 원주출신)가 승하하자 한양 북쪽인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에 능을 조성했는데, 이 일대를 능으로 조성하기 위해 756기(무연고 667기, 연고묘 89기)에 이르는 백성들의 묘가 강제 이장(移葬)당하자 당시 이곳에서는 ’왕비를 묻는데 수백 기의 백성들 무덤을 파헤쳐야 하느냐‘며 원망했다고 전해지며, 인조도 사후 이곳에 묻혀 장릉(長陵:사적제203호)이라 부르고 있다. 죽으면 끝인 게 세속(世俗)의 이치지만 왕(王)은 죽어도 끝이 아니다. 죽어도 편히 눈 감지 못하며, 살아있는 자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것이 왕이다. 왕위(王位)에 올랐다는 이유로 언제나 동시대인(同時代人)들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영원(永遠)한 숙명(宿命)이다.

△ 민회빈 강씨는 일산에 있는 소현세자의 소경원 묘역이 아니라 경기도 광명시 노은사동 산언덕의 금천 강씨 묘역에 묻혀 사후에도 부부가 애닯프게 이별하고 있다.ⓒ문화재청△ 민회빈 강씨는 일산에 있는 소현세자의 소경원 묘역이 아니라 경기도 광명시 노은사동 산언덕의 금천 강씨 묘역에 묻혀 사후에도 부부가 애닯프게 이별하고 있다.ⓒ문화재청

봉림대군은 효종(孝宗)에 등극(登極)하자 반청사상(反靑思想)에 비롯된 북벌(北伐)계획을 세워 10년동안 3만명의 정예군(精銳軍)을 목표로 추진하였으나, 겨우 5,600여 명의 부대로 전략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어중이떠중이', '어영부영:御營不營)’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어영은 당시 어영청(御營廳:조선시대 삼군 중 하나인 최정예 야전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10년의 북벌계획이 한낮 물거품이 되어 40세의 나이로 승하했는데, 어의(御醫)가 얼굴에 난 종기에 침을 놓은 직후 피를 쏟고 죽었으며, 처음 묻힌 곳은 동구릉(東九陵:경기도 구리시-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 안장)내의 원릉(元陵:영조와 정순왕후,사적제193호)터 였으나, 터가 불길하고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해 1673년 경기도 여주시(驪州市) 세종대왕(世宗大王:1397~1450년)이 묻힌 영릉(英陵:사적제195호,능서면영릉로269-50)뒤 언덕 넘어 영릉(寧陵:효종과 인선왕후:사적제195호,능서면 영릉로263-50)에 영면(永眠)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홀로 영면(永眠)하고 있는 소경원(昭慶園:사적제200호)은 서삼릉[(西三陵:희릉(禧陵:중종 계비 장경왕후), 효릉(孝陵:인종과 인성왕후), 예릉(睿陵:철종과 철인왕후) 등의 3기 능] 입구에서 약 2Km 떨어진 외딴 곳에 조성돼 있으며,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사망한 맏아들 경선군과 둘째 경완군의 묘가 소경원 인근 군부대 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답사를 하고자 해당 궁릉관리소(宮陵管理所)에 답사 신청을 했으나, 소경원 자역이 농협 젖소목장안에 있어 현재 코로나19 방역(防疫)으로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관리소측의 답변이 있어 아쉽지만, 차후에 기회를 갖기로 했다. 8년간 볼모의 신분으로 갖은 고난을 감내(堪耐)하면서 대륙에서 품은 웅지(雄志)를 조선에서 펼쳐보지 못하고 혼군(昏君:질투심 많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소인배)인 아버지로 인해 사후(死後)에도 세자빈(世子嬪)은 멀리 떨어진 광명시에 홀로 두고 이렿게 각종 시설에 둘러싸인 고립(孤立)된 곳에 묻혀있는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인조는 생전(生前)에 한 번도 자식의 묘를 찾지 않았다고 해 후세에 비정(非情)한 아비라는 비판을 받을 뿐 아니라, 독살설에 신빙성(信憑性)을 부여하고 있으며, 고종 7년(1870년)에야 비로서 이곳을 소경원으로 높혀 부르게 됐다. 

“부국(富國)하고, 강병(强兵)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赦)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김인숙, 소현 P316]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조선 왕조의 통치(統治) 이념이라고 할 수 있었던 성리학(性理學)은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않는 공허(空虛)한 학문이였으며, 문(文)에 치우치고 무(武)를 경시(輕視)-당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년)중 노랑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한 이순신(李舜臣:1545~1595년) 장군이 거론되는 것 자체를 금기(禁忌)했을 뿐아니라 영웅시(英雄時) 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했으며 신분(身分) 차별과 함께 양반(兩班)들은 백성들에게 수탈(收奪)과 억압(抑壓)속에 짐승같은 삶을 살게 했다. 허례허식(虛禮虛飾)과 명분(名分)에 집착하며 실리(實利)를 잃게 했으며 성리학에 세뇌(洗腦)된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은 실천(實踐)은 없고 명분만 내세우며, 당쟁(黨爭)으로 국력의 소모는 물론 유능한 인재(人材)를 말살(抹殺)하였고, 결국 소중화(小中華)라며 명나라에 사대(事大)하다 망국(亡國)의 길을 걷고 말았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반정(反正)의 법고창신(法古創新) 가치를 잊고 아비가 자식과 며느리, 하물며 손자까지 죽이고 당대(當代)의 치적을 기록하며 그 이름처럼 ‘어진 임금(仁祖)’으로 남길 바랐지만, 세월이 흘러도 날카롭고 준엄(峻嚴)한 역사의 심판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며, 조선 왕조에서 왕은 「무결점(無缺點)의 존재(存在)」라고 하면서 조카가 삼촌을, 삼촌이 조카를 하물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것이 왕도(王道)요, 패도(覇道)라며, 수 없는 말과 글로 주장할지 모르지만, 세상이 변하고 또 변해도 사람의 도리 즉, 「인륜(人倫)의 도리(道理)」를 무엇으로도 합리화(合理化)할 수 없는 것이며, 왕조 5백여 년 동안 왕다운 왕은 손을 꼽을 존재이고, 자격도 되지 않는 왕들 때문에 왜군(倭軍)들에게 민초(民草)들은 귀가 잘려 일본 교토(京都)에 애닳픈 무덤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존명(尊明)과 사대(事大)로 지세우다 이(異)민족들에게 수 십만명이 노예(奴隸)로 끌려가는 등의 수난(受難)을 당하였음은 물론, 왕조(王朝)말기에도 무능(無能)한 왕을 비롯해 아비와 며느리의 권력 다툼으로 말미암아 일제(日帝)에 의해 36년 동안 겨레얼과 말까지 잃을 뻔한 위기(危機)를 당하였고, 이로 인해 6.25라는 민족(民族)간 전쟁으로 허리가 잘린지 70년이 지나도 통일(統一)은 요원(遼遠)한 지금. 역사(歷史)에는 따뜻한 가정(假定)은 없고, 늘 서늘할 교훈(敎訓)만 있을 뿐이다.”라고 하지만, 걸출(傑出)하고 영민(英敏)했던 두 인물 즉, 소현세자와 세자빈이였던 민회빈 강씨가 심양땅에서 백성들을 돌보면서 위대한 조선을 설계했던 그들이 가진 꿈이 펼쳐졌었다면 260여 년후 일제(日帝)의 침략과 국권 피탈(被奪), 동족간 전쟁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굴곡(屈曲)된 역사가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며, 김구(白凡 金九,1876~1949년) 선생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1936년) 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는 말이 결론이 아닐까 한다.

▷ 답사 문의 :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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