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아들도 좀 데리고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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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납북 천왕호 선원 이해운씨 ‘팔순 老母’
병상에서 ‘32년만에 귀환’ 아들 동료 만나 오열
“아이고, 우리 아들 좀 데리고 나오지. 어째 혼자 나오셨소. 우리 아들 해운이 손톱이라도 빼오지.”
11일 서울 역삼동의 한 병원 입원실.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납북된 오징어잡이 어선 ‘천왕호’ 선원 이해운(납북 당시 20세)씨의 어머니 손봉녀(81)씨가 지난 1월 귀환한 천왕호 사무장 최욱일(67)씨를 붙잡고 통곡했다.
하얗게 센 머리에 주름진 얼굴, 헐렁한 환자복 위에 허리를 받쳐주는 보조장구를 착용한 손씨는 “우리 해운이가 (천왕호에서) 제일 어렸소. 그저 돈 벌어서 고등학교 가겠다고 배를 탔는데, 부모 잘못 만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 있는지…”라며 눈물을 찍어냈다.
손씨는 아들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지난 2005년 천왕호 선원 고명섭씨가 30년 만에 탈북해 고향인 강원도 주문진에 돌아왔을 때도 빛 바랜 중학교 졸업사진을 내밀며 “우리 아들 해운이 봤소? 우리 해운이 좀 봤는지 기억 좀 해주소”라며 통곡했었다.
손씨는 단 한 장 남은 아들의 졸업사진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꼭 품고 살아왔다. 아들이 보고 싶으면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닳도록 쓰다듬었다. 손씨는 “내가 우리 해운이 때문에 죽지 못해 살고 있소. 죽을 때도 이 사진은 꼭 안고 죽을 거요”라고 말했다. 손씨는 온몸의 뼈가 성한 데가 없고 혈압도 높아 거동조차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죽기 전 해운이만 볼 수 있다면 북한에까지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했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가 최근 구해온 ‘천왕호 출어 전 촬영 사진’을 꺼내 보여주자 손씨는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 속에 있었구나”라며 사진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최 대표와 함께 온 납북어부 이재근(2000년 귀환)씨가 “내가 북에서 해운이 만났는데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들 낳고 잘 살고 있으니 그저 어머니 건강이나 돌보세요”라고 위로했지만 손씨의 눈물은 멎을 줄 몰랐다.
‘큰일’ 날까 사망소식 못알려
손씨는 “못 보니까 잘 있다고 해도 애가 타요. 최 대표님, 우리 아들 꼭 좀 데려다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이날 최욱일씨 등은 끝내 손씨에게 아들의 사망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이들은 병실을 나와서야 손씨의 딸 명옥(50)씨에게 해운씨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최욱일씨 등에 따르면 함경남도 함흥에 살던 이해운씨는 1990대 초반쯤 수해 복구작업을 나갔다가 물에 휩쓸려 숨졌다고 한다. 명옥씨는 오빠의 사망 소식이 차마 믿기지 않는 듯 “우리는 그저 통일만 되면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이 소식을 어머니께 어떻게 전하느냐”며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금방 명줄을 놓을 것만 같다”고 발을 굴렀다. 지켜보던 이들도 그저 말없이 눈물만 닦아냈다.
조선일보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병상에서 ‘32년만에 귀환’ 아들 동료 만나 오열
“아이고, 우리 아들 좀 데리고 나오지. 어째 혼자 나오셨소. 우리 아들 해운이 손톱이라도 빼오지.”
11일 서울 역삼동의 한 병원 입원실.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납북된 오징어잡이 어선 ‘천왕호’ 선원 이해운(납북 당시 20세)씨의 어머니 손봉녀(81)씨가 지난 1월 귀환한 천왕호 사무장 최욱일(67)씨를 붙잡고 통곡했다.
하얗게 센 머리에 주름진 얼굴, 헐렁한 환자복 위에 허리를 받쳐주는 보조장구를 착용한 손씨는 “우리 해운이가 (천왕호에서) 제일 어렸소. 그저 돈 벌어서 고등학교 가겠다고 배를 탔는데, 부모 잘못 만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밥이나 제대로 먹고 있는지…”라며 눈물을 찍어냈다.
손씨는 아들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지난 2005년 천왕호 선원 고명섭씨가 30년 만에 탈북해 고향인 강원도 주문진에 돌아왔을 때도 빛 바랜 중학교 졸업사진을 내밀며 “우리 아들 해운이 봤소? 우리 해운이 좀 봤는지 기억 좀 해주소”라며 통곡했었다.
손씨는 단 한 장 남은 아들의 졸업사진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꼭 품고 살아왔다. 아들이 보고 싶으면 사진 속 아들의 얼굴을 닳도록 쓰다듬었다. 손씨는 “내가 우리 해운이 때문에 죽지 못해 살고 있소. 죽을 때도 이 사진은 꼭 안고 죽을 거요”라고 말했다. 손씨는 온몸의 뼈가 성한 데가 없고 혈압도 높아 거동조차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죽기 전 해운이만 볼 수 있다면 북한에까지 기어서라도 가겠다고 했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가 최근 구해온 ‘천왕호 출어 전 촬영 사진’을 꺼내 보여주자 손씨는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 속에 있었구나”라며 사진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최 대표와 함께 온 납북어부 이재근(2000년 귀환)씨가 “내가 북에서 해운이 만났는데 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들 낳고 잘 살고 있으니 그저 어머니 건강이나 돌보세요”라고 위로했지만 손씨의 눈물은 멎을 줄 몰랐다.
‘큰일’ 날까 사망소식 못알려
손씨는 “못 보니까 잘 있다고 해도 애가 타요. 최 대표님, 우리 아들 꼭 좀 데려다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이날 최욱일씨 등은 끝내 손씨에게 아들의 사망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이들은 병실을 나와서야 손씨의 딸 명옥(50)씨에게 해운씨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최욱일씨 등에 따르면 함경남도 함흥에 살던 이해운씨는 1990대 초반쯤 수해 복구작업을 나갔다가 물에 휩쓸려 숨졌다고 한다. 명옥씨는 오빠의 사망 소식이 차마 믿기지 않는 듯 “우리는 그저 통일만 되면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이 소식을 어머니께 어떻게 전하느냐”며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금방 명줄을 놓을 것만 같다”고 발을 굴렀다. 지켜보던 이들도 그저 말없이 눈물만 닦아냈다.
조선일보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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