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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납북자 가족 한서린 세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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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263회 작성일 04-10-2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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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납북자 가족 한서린 세월 ⑤
납북됐다 돌아온 이른바 '귀환자들'은 더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난 69년 6월 연평도 부근으로 조기를 잡으러 갔다가 납북된 복순호 기관장이었던 최순복(崔順福.52.충남 장항읍 창선1리)씨는 요즘도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

"집 고치면 어디서 돈이 생겼느냐고 묻고 아들 3명은 무슨 돈으로 키우느냐고 묻는 판인데 어느 집에 갔다가 그 사람까지 피해 받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복순호 선원 중 선장 임판길씨 등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최씨 등은 같은 해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인천 황해여관에서 조사를 받았죠. 북한에서 그 때 돈으로 45만 원이랑 장작, 옷감 같은걸 잔뜩 실어줬는데 그 장작으로 두들겨 맞았어요. 북한에서 장작을 왜 실어줬는지 모르겠어요."
최씨는 다시 경찰서 조사를 받고 기소돼 홍성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는 징역 7년 구형에 1년6월 실형을, 항소심에서는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무슨 죄로 재판을 받고 징역살이를 했는지 지금도 모른다. 다만 북한 돈을 받았다고 해서 징역을 살았으려니 하고 짐작할 뿐이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검찰은 당시 복순호 선주 최남옥(崔南玉)씨를 비롯, 어부들이 자진 월북해서 공작금을 받아온 것으로 몰아 간첩죄로 기소했다.

"한 1년인가 징역 살고 나와서부터 시집살이가 시작됐죠. 경찰은 별로고 비인에 있는 보안대(現 기무사)에 불려가서 매타작을 당했죠. 3명이 한 조인데 자기들끼리 서로 이름도 안 부르고 1년에 한 서너 차례씩 불러서 매타작을 했죠. 추울 때 물 붓고 창고에 가둬놓을 때가 미치겠더구만요"

최씨는 이후 15년 동안 서천경찰서에도 종종 불려 다녔고 대전에 있는 '충남기업사'라는 중앙정보부에도 가끔 불려가서 2-3일씩 조사를 받곤 했다고 증언했다. '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혹시 북한에서 연락 온 것 없느냐'는 조사였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어서 조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북한 갔다왔으니까 지들 필요하면 부르는 거죠. 때리지만 않으면 황송해할 때니까 '왜 자꾸 불러서 조사 하냐'는 얘기는 하지도 못했죠"
자신이 귀환자인데다 동생까지 납북된 이양일(61.전북 군산시 산곡동)씨는 더했다. 58년(이씨 기억으론 60년) 광영호를 타던 중 납북됐다 돌아온 이씨는 당시에는 별다른 조사를 받지 않았지만 67년 5월 승용호 선원이었던 동생 이성일(李成一.52년생.2001년 북한에서 사망))씨가 납북된 뒤 68년말부터 경찰서와 보안대에 불려 다녀야 했다.

"68년 11월인가 12월에 군산경찰서 정보3계(現 보안과)에서 부르더니 '너도 이북 갔다오고 동생도 안 왔다'며 때리대요. 그때 하도 맞아서 몸이 붓기에 옷을 찢어야 했죠"

이씨는 69년 2월 구속돼 군산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이 선고됐고 항소는 기각돼 70년 2월 만기 출소했다.

이씨는 지금도 자신이 왜 징역살이를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67년 대성호 기관장을 할 때 '월선 작업'을 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풀려나자마자 방위병으로 군 복무도 마쳤지만 취직도 못했고 친척들이나 동네 사람들도 자신을 피했다.

대신 3개월마다 활동 상황을 자필로 써서 파출소에 내야 했다. 63년에 결혼, 자식을 5명이나 낳았지만 취직을 못했기 때문에 부인이 이일 저일 해서 번 돈으로 살았고 자신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 후에도 군산보안대와 전주보안대에 끌려가서 얻어맞았다. 어머니와 동생 이광일(李光一.54.전북 군산시 삼학동)씨까지 함께 끌려간 적도 있다. '학교처럼 생긴' 전주보안대에서는 동생 이성일씨와 접선한 사실을 자백하라며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두들겨맞았다.

"3일째 저녁때 누군가 저보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질긴 놈 처음 본다. 이 정도 되면 (접선을) 안 했어도 했다고 해야지'라고 하더구먼요. 5일만에 고문 안 당했다는 시인서 쓰고 풀려났죠"
특히 이씨 일가가 개야도(전북 옥구군 옥도면)라는 섬에 살다 보니까 어디선가 간첩사건이라도 났다 하면 섬 전체가 들썩거렸다.

"경찰에서 집에 벨을 매달아놨어요. 무슨 일 나면, 그러니까 동생이 나타나면 누르라고...집 마루 밑에선 경찰들이 잠복 근무도 섰죠"
그 후로도 검찰이나 경찰에 불려 다니다 89년께야 3개월마다 신고를 해야 하는 족쇄가 풀렸다.

"그때부터 배도 타고...'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했죠. 그전에 일 못해서 빚을 많이 졌기 때문에 아무리 일해도 빚 갚기도 바빴고 현재까지 그것 때문에 고전합니다"
그 후로도 1년에 한두번씩 경찰서에 불려 다녔지만 지난해 5월 이성일씨 아들 광철군(24)씨가 탈북해서 입국한 직후 '축하한다'는 전화를 끝으로 경찰에서도 더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최순복씨나 이양일씨 모두 기자가 지난해 12월 17-18일 만났을 때만 해도 자세한 얘기를 꺼리고 있었다. 대신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아닌 말로 매타작 당하고 그러노라면 차라리 북한서 살걸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있죠. 보안대 애들 지금 밖에서 만나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도 하고... 고기 잡은게 죄죠"(최순복씨)

"김대중씨가 대통령 됐어도 좋은 일 하나도 없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없는 놈은 더 없어지고 있는 놈은 더 쌓이는 것 아닙니까. 돈이 많았으면 맞지도 않았겠죠. 내가 광철이한테도 그랬어요. 여기는 돈 없으면 이북보다 못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분통 터지죠. 경찰이든 뭐든 내가 언젠가 한번 들어가면 가만히 안 있으려고 합니다"(이양일씨)

지난 2000년 9월 동생 성일씨가 잠시 탈북했을 때 연락을 받고서도 중국에 가지 않았던 이씨는 "제가 동생이 중국에 나왔다는 데도 가지 않은걸 보면 그동안 얼마나 텁텁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연합
2003-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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