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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납북자 가족 한서린 세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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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012회 작성일 04-10-2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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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납북자 가족 한서린 세월⑥
부산을 떠난 기자가 경남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를 찾은 것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해 12월 15일.

거제시내의 열띤 선거전과는 거리가 먼듯 일요일인데도 이곳에서 들리는 건 무심한 파도소리 뿐. 두사람이 겨우 비껴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촘촘히 들어앉은 단독주택 외에는 식당도 여관도 없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자그마한 어촌이 조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유달리 침울하고 적막하게 느껴진 이유는 납북어부 가족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농소리 80여가구 중 납북자만 14명, 납북자 집안은 11가구. 남편과 오빠, 남편과 아들, 두 아들을 잃은 집도 3가구나 된다. 지금은 일부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지만 아직도 8가구 정도 남아있었다.

취재기자가 온 소식을 듣고 납북어부 가족들이 72년 12월 납북된 오대양62호 정도평(58)씨의 어머니 옥말분(77)씨의 집으로 찾아왔다. 옥씨가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운신할 수 없는 상태라서 이 집에 모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타지로 외출해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은 옥말분씨와 박규순(72)씨, 옥철순(71)씨 뿐이었다.

"뭣때메 오셨수? 어차피 기자는 정부편이겠는데. 뭐 취재할게 있다구"
옥말분씨와 박규순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킨채, 비교적 정정해 보이는 옥철순씨가 싸늘하고 의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오대양62호와 함께 납북된 오대양61호 선장 박두남(69)씨의 부인으로 이 마을 납북어부 가족의 반장격이었다.

납북어부 가족들의 애환을 다루려 한다는 기자의 말에 "밤낮 말하면 뭐하나. 이미 기자들이 왔다갔지만 해결되는게 하나도 없는데. 지난 9월에도 통일부에서 사는 형편 알아본다고 왔다지만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잠시 물어보더라. 그래서 이번엔 연락받고도 모른척 했다"라며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들에게 언론은 정부와 한 목소리를 내는 정부대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30분 넘는 기자의 설득에 마침내 이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비로소 지나온 30년 세월의 한을 쏟아냈다.

그중에서도 일찍이 남편을 잃고 가장노릇을 하던 아들마저 납북되는 바람에 남은 가족은 뿔뿔이 헤어지고 홀로 사는 할머니들의 한맺힌 사연은 듣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납북된 오대양 61호의 김의준(57).태준(49)씨 형제의 어머니 박규순씨.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2남1녀를 키우던 박씨에게 생계를 위해 한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던 두 아들의 납북은 청천벽력이었다.

남은 딸마저 두 오빠의 납북 이후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가출해 버렸다. 딸은 10여년 전 불쑥 나타나 갓 태어난 손자를 남겨놓고 다시 집을 나간 뒤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현재 13살인 손자를 키우며 외롭게 살아가는 박씨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두 아들을 만나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납북됐으니 기가 막힌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거 말 다 못한다. ...그래도 살려고 교회에 나갔다. 꿈에 큰아들이 보이던데 기자 양반이 아들 좀 만나게 해주세요"
이제는 눈도 안보인다는 박씨는 두 아들 납북 뒤 친정집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다가 15년 전부터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옥말분씨는 최근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운신도 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서 외아들 정씨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몸이 아파 죽기 전에 아들을 보지 못할 것 같다"며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아들 못보고 죽을 것이 무섭다"고 말했다.

20살에 남편을 잃은 옥말분씨에게 외아들 정씨는 가장이자 집안의 희망이었다. 외아들은 납북되기 1년 전에 결혼했는데 며느리는 남편이 납북되자 유복녀를 낳은 뒤 곧바로 집을 나가버렸다.

그때부터 옥말분씨는 '얻어먹고 빌어먹었지만' 아들의 유일한 핏줄인 손녀(30)를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손녀는 공부를 잘해 장학생으로 경남대에 들어갔고 지금은 울산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 손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 할머니의 속을 썩이고 있다. 그래도 한편으론 한번도 못 본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기특하단다.

납북자 가족들 중에는 남은 가족의 장래를 위해 납북자를 사망신고한 이들도 적지 않지만 가족이라야 아들밖에 없는 농소리 할머니들은 아직도 사망 신고를 하지 않고 아들과 만나는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다.

아직도 남편을 기다린다는 옥철순씨는 그저 남편이 이 하늘아래에 살아만 있으면 된단다.

"북에선 납북자를 무조건 결혼시킨다고 하니까 아마 남편도 결혼했을거다. 내는 차라리 남편이 결혼한게 다행이라 생각한다. 가족이라도 있으면 강냉이죽이라도 얻어먹으며 살거 아닌가. 어떤 때는 납북자 가족에 무심한 정부가 원망스러워 청와대 앞에 가서 항의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생사만이라도 확인해달라"
3시간 넘게 대화하는 과정에 기자를 안내한 대금리의 납북어부 가족 황화봉씨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익살을 떨기도 했지만 이들 할머니의 얼굴에서는 끝내 웃음을 볼 수 없었다. 생사도 알길 없는 아들.남편들이 이들에게서 오래전에 웃음을 깡그리 앗아간 채 한만 가득 안긴 것이다.

"아들 한번 보면 가슴에 맺힌 한이 다 풀릴 것 같다. 죽어도 원이 없다. 소원 좀 풀어달라. 내 아들 찾아달라"
농소리 할머니들의 한맺힌 외침이 한동안 메아리처럼 귀에 쟁쟁하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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