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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어부.. 31년 만에 눈물의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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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889회 작성일 04-10-2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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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어부 母子 31년 만에 눈물의 상봉


"널 만나려고 모진 인생 버텼어"...장남은 北서 사망 … 끝내 못만나


두아들 피랍후 연좌제 등 고초
"죽지 못해 살았어.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너를 만나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았어…."

고기잡이를 나갔다 북에 끌려간 둘째아들 김태준(49)씨를 31년 만인 23일 금강산여관에서 만난 남녘의 어머니 박규순(76.경남 거제시 장목면 농소리)씨는 말을 잇지못한 채 연신 눈물을 훔쳐 닦았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채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朴씨는 둘째아들의 말을 듣곤 넋을 놓고 말았다.

"함께 북에 왔던 형님은 5년 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금강산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22일 속초에서 대한적십자 관계자로부터 "큰 아들(김의준)은 이미 죽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며 몇번이나 부인했으나 끝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朴씨가 두 아들과 생이별을 한 때는 1972년 12월. 당시 두 아들은 일찍 남편을 잃고 2남1녀를 키우던 어머니를 돕겠다며 '오대양 61호'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뒤늦게 관계당국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납북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 뿐이었다. 朴씨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당시 정권은 납북자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남은 가족마저 심한 감시와 연좌제 등 갖은 족쇄로 묶었다. 朴씨의 생활은 더욱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두 오빠가 납북된 뒤 딸은 장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가출했다가 10여년 전 불쑥 나타나 갓 태어난 손자를 남겨놓고 다시 집을 나가버렸다.

그 후 朴씨는 친정집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오다 15년 전부터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매달 받는 20여만원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그나마 朴씨에게 위안이 된 것은 같은 처지의 동네사람들과 아픔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소리에 사는 80여 가구 중 납북자 가족은 11가구에 이르고, 이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생이별의 고통을 달래왔던 것이다.

태준씨가 한동안 감싸안은 뒤에야 정신을 차린 朴씨는 둘째 며느리 박화실(46)씨, 손녀 김은정(14)양, 큰 며느리 백숙찬(54)씨와 손자 김백남(24)씨의 손을 잡고 혈육의 정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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