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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이야기] '6·25 때 유격활동' 납북어부, 국가유공자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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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소낭
댓글 0건 조회 2,283회 작성일 09-05-0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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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최원모씨의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고 흡족해하는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최성용씨./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묻히셨는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한(恨)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서 생전에 이 소식을 들으셨으면 무척이나 기뻐하셨을 텐데…."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57) 대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최씨의 아버지 최원모(납북 당시 57세)씨가 6·25 전쟁 당시 유격 백마부대원으로 활동했던 공로를 인정,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했다. 6·25 전쟁 이후 납북된 민간인 가운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최원모씨가 유일하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최원모씨는 이승훈(李昇薰)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중퇴하고 정주군에서 어업에 종사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치안대를 이끌며 공산군에 맞섰다. 1950년 11월 평안북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하게 되자, 최원모씨는 당시 오산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돼 창설한 유격대인 백마부대에 합류했다.

6·25 전쟁 당시 유격백마부대는 서해 도서(島嶼) 지역을 오가며 유격전을 펼쳐 북한군 3000여명을 사살하고, 중공군 600여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군번 없는 유격대로 참전한 백마부대원들은 552명이 전사했다.

최원모씨는 유격백마부대에서 유일한 동력선인 40t급 북진호(北進號)의 함장을 맡았다. 북진호는 보급과 포로 수송, 부대원과 민간인 대피 등을 담당했다. 한봉덕(83) 유격백마부대 전우회장은 "최원모씨와 북진호가 없었다면 도서 지역에서의 유격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최원모씨는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충남 서천으로 내려가 피란민 거주지역에 터를 잡고, 배 세척을 모는 선주(船主)가 됐다. 그는 1967년 6월 4일 풍복호를 몰고 선원 7명과 함께 연평도 부근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중 북한 경비정 10여척에 포위돼 총격을 받고 납북됐다. 다른 선원 5명은 풀려났지만 최원모씨는 유격백마부대에서 활동한 전력(前歷)이 드러나 다른 선원 2명과 함께 북한에 억류됐다. 최성용씨가 최근 확보한 정부 기록에는 "(최원모씨가) 6·25 전쟁 당시 남하하면서 원적지에서 좌익분자를 살해한 것이 발각돼 억류됨"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최원모씨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최성용씨가 귀환 납북어부나 탈북자 등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의 부친은 1970년쯤 처형당했다고 한다.

최원모씨의 아내 김애란씨는 지난 2002년 금강산 이산가족상봉장에서 남편의 사진을 꺼내들고 "생사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북측은 '확인불가' 통보만 했었다.

김씨는 "내가 죽거든 화장해라.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아서 화장해 함께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난 2005년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어머니의 유골 일부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최성용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때까지 북한에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 등을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준호 기자 l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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