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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납북"오대양호"가족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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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2,884회 작성일 10-01-18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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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납북된 오대양호 기관 장 박영석씨가 84년 북한에서 낳은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김용우 기자

"기관장 박영석씨 생존… 꺼내온다"
탈북자가 신분 위장해 2004년 접촉
4000만원 받은 뒤 소식 끊어져 알고보니 살해범…
현재 국내 수감가족들 '10년전 이미 사망' 최근 확인

지난 16일 오후 10시 부산시 초량동 부산역 인근 10층 건물의 한 사무실에서 박모(41)씨가 아버지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북한에서 전해온 1984년도 사진 속 아버지(당시 47세)는 또래보다 훨씬 늙었다. 사진을 뚫어져라 보며 3살 때 헤어진 아버지 얼굴을 떠올려보지만 어슴푸레할 뿐이다. 눈매가 닮은 듯도 하다. 아버지는 이름 모를 여자 아이도 안고 있다. 배다른 동생일 것이다.

사진 속 아버지는 1972년 12월 홍어 잡으러 인천항을 떠났다가 서해 북방한계선 근처에서 납북된 오대양호(號) 기관장 박영석(당시 35세)씨다.

아들 박씨가 생사조차 몰랐던 아버지 사진을 보게 된 것은 2004년 여름이었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58) 대표를 통해서였다. 최 대표는 중국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교회 선교사 김송일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사내는 납북자를 국내로 송환하는 일을 하는 최 대표를 돕고 싶다고 했다. 사내는 "1972년 납북된 박영석씨가 신의주 근처에서 부인과 딸 하나를 두고 살고 있다"며 "같이 데리고 나오자"고 제안했다. 그 뒤 박영석씨가 북한에서 낳은 딸과 찍은 사진까지 보내왔다.

아들 박씨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최 대표와 함께 아버지를 데려오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는 지난 16일 밤 최 대표로부터 비보(悲報)를 전해들었다. 최씨는 "아버지는 이미 2000년 영양실조로 숨졌다"고 했다.

6년 전 살아있다던 아버지가 이미 10년 전 사망했다니 아들은 혼란스러웠지만 금세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뺨에 흘렀다. 서해 바다를 넘어온 사진 속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며 발버둥치는 듯한 그 표정이 눈에 선했다. 이미 1996년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도 떠올랐다. 아들을 강하게 키우려 어머니는 아버지 얘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박씨는 "아버지 정(情)이라는 걸 평생 모르고 자랐다"며 "북한에서 재혼한 부인과 딸까지 데리고 온다니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했다.

2남2녀 중 장남이었던 박영석씨의 막내 여동생(64)은 "납북되기 전 조카딸 돌잔치를 앞두고 '좋은 생선 가져 올 테니 생선 걱정은 하지 마라'던 큰오빠 모습이 지금도 어른거린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새 올케가 오면 입힐 옷까지 사놓고 오빠를 기다렸지만 허사가 됐다.

납북자를 데려오겠다던 선교사 김씨의 말은 애초 거짓말이었다. "배를 준비해 놓으라"며 당장에라도 북한의 박씨 가족을 데리고 올 것처럼 생색내던 김씨는 어느 날 갑자기 "조금만 기다리라"며 애를 태우기 시작했다. 구출작업에 필요하다며 요구하는 활동비와 물품은 늘어만 갔다. 최 대표는 "김씨에게 건넨 돈만 4000만원쯤 된다"며 "북한 당국자에게 뇌물로 써야 한다며 최신 휴대전화와 운동화, 마취제에 이르기까지 요구 사항도 많았다"고 했다.

1972년 납북된 박영석씨 여동생(왼쪽)과 아들(가운데)이 부산에서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로부터 박씨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슬픔에 빠져 있다./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2005년 초 선교사 김씨는 연락을 끊었다. 최 대표는 수소문 끝에 김씨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정체도 드러났다. 본명이 윤경석(49)인 그는 북한에서 세균 조사 연구원으로 있던 1996년 탈북해 국내로 들어왔다. 2003년 서울 송파구에서 동거녀 자매를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해 인터폴 수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4월 국내로 송환된 그는 북한 보위부 지령을 받고 최 대표를 중국으로 유인해 납치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최 대표는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차마 박씨 가족에게 할 수 없었다"며 "그 뒤로도 박씨를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고 했다. 박씨 가족들은 틈만 나면 "어떻게 돼가느냐"며 최 대표를 재촉했다.

그러던 중 작년 8월 교도소에서 윤씨가 최 대표에게 편지를 보냈다. "살인을 하고 도피 생활을 하면서 그야말로 인생 막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됐다"고 했다. 최 대표는 작년 12월에야 북한의 박영석씨 소식을 최종 확인할 수 있었다. 박영석씨와 북쪽 부인은 2000년 영양실조로 숨졌다. 신체장애가 있던 딸의 행적은 알 수 없었다.

아들은 "왜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 사진으로 사기를 쳤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도소에 찾아가서라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박영석씨 여동생은 "어제까지만 해도 희망이 있었는데…"라며 오열했다. 살아있다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제사도 지내지 않던 가족이었다. 아들은 올해부터 아버지 제사를 어머니 기일에 맞춰 함께 지내기로 했다.

아들은 "시대의 비극"이라며 멍하니 사무실 천장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소식을 궁금해하던 초등학교 다니는 딸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걱정입니다." 아들 박씨가 지갑 속으로 아버지 사진을 밀어 넣었다. 지갑 다른 면으로 어머니가 곱게 한복을 입고 찍은 독사진이 언뜻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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