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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명단에 우리 부모님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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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922회 작성일 04-10-2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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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사변 피랍치자 8만2959명 명부」와 「6·25사변 피살자 5만9994명 명부」 발간 소식(본지 15일자 A10면)이 전해지자 이 명부를 발간한 월간조선에는 15일 하루에만 명단을 문의해온 납북자·피살자 가족들의 전화가 800여 통이나 걸려 왔다.

월간조선 출판기획부 김민희 기자는 『부모님이 피살 또는 납북됐는지 몰라서 확인을 요청하는 전화도 많았다』면서 『6·25때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인민군에게 체포됐다며 울먹이는 희생자 가족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들 희생자 가족들 중 일부는 월간조선 사무실을 직접 찾아와 전쟁 당시 행방불명됐거나 납북·피살된 가족들의 이름을 일일이 찾아보기도 했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사는 강준(71)씨는 6·25 당시 경찰관이었던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다. 아버지 강병옥(姜炳鈺)씨가 인민군에 납치돼 소설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와 평양 형무소에 함께 갇혀 있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는 『남들이 노부모를 모시고 다니는 걸 보면 눈물이 난다』며 『아버지의 함자만이라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북한이 더 이상 납북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하지 말고 납북자들의 죽은 날짜만이라도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 옥인동에 사는 강은희(44·여)씨는 대전에 사는 시아버지의 전화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 전쟁 당시 충남 예산군청 내무과장이었던 시할아버지(장국현)의 이름을 피살자 명부에서 확인한 강씨는 마치 시할아버지가 살아온 듯이 기뻐하기도 했다.

나왕식(67)씨는 부친이 피살당한 경우다. 1950년 7월 12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서 북한 인민군에 의해 피살된 나씨의 부친(나대근·羅大根·당시 45세)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 결성된 우익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간부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중3이었던 나씨는 『괴뢰군은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면서 울분을 토로했다. 화성군을 「접수」한 인민군들은 「반동」으로 분류한 주민들을 지하 동굴에 가둬 두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그는 전했다.

나씨는 부친의 사망사건을 당시 화성경찰서가 확인,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전쟁 와중에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국가기관 어디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월간조선이 발행한 「피살자·피랍자 명부」에 대해 『정부기록보존소에도 없는 우리와 같은 가족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이들 중에는 “나의 친척이 납북자·피살자라는 공인을 정부로부터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며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보상을 해주고 국가를 위해 일하다 인민군에 의해 맞아 죽은 아버지는 누구한테 보상받아야 하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은 “납북자·피살자는 약 14만명으로, 따라서 그 친족은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정치권과 정부는 북한측에 생존자 확인과 귀환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6·25사변 피랍자 명부’의 존재는 2002년 월간조선 2월호에 보도됨으로써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월간조선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존돼 있던 명부를 찾아낸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한자로 된 이 자료의 명칭을 한글로 잘못 적어 분류에 착오가 발생해 그 자료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월간조선 보도 이전까지 통일부 등 관계 당국은 명부의 존재조차 부인해 왔다.
/金南仁기자artemi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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