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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납북 어부, 삼촌은 국군포로, 나는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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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16회 작성일 12-10-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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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납북 어부, 삼촌은 국군포로, 나는 탈북자

조선일보/이용수 기자

 

차정희씨의 기막힌 인생

아버지 고향 흑산도 찾았지만 빨갱이 가족 누명 쓰고 흩어졌던 친척들은 만남 거부

"조부모 산소에 술 한잔 올리고파"

 

"사촌 오빠들에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추석도 지났으니 오빠들이랑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술 한잔 올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탈북자 차정희(35)씨의 아버지 종석씨는 원래 어선 선장(船長)이었다. 1968년 9월 29일 연평도 인근에서 조업하다 북한군에 나포됐다. 선원 7명 중 4명은 나중에 풀려났지만, 선장 종석씨는 고향(전남 흑산도)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희씨는 "북한 당국이 아버지에게 '남조선 괴뢰도당이 당신 가족을 모두 학살해 시체도 바다에 던져버렸다. 돌아가도 소용없다'고 회유한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북한은 국군포로로 끌려와 살던 친형 종근씨도 종석씨와 만나게 해줬다.

 

종석씨는 북한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정희씨 등 1남 3녀를 낳았다. 북한은 처음엔 종석씨를 평양에 살게 했지만, 얼마 뒤 함경북도로 강제 이주시켰다. 종석씨는 탄광 노동자로 일하다 결핵에 걸렸다.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아보고 1989년 숨졌다.

 

이때부터 정희씨 가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으로 배급도 끊기면서 정희씨는 어머니 친척이 사는 개성·남포·함흥을 떠돌며 입에 풀칠했다.

 

정희씨가 '중국에 가면 먹고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건 1998년 가을이었다. 한밤 국경수비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공안(公安)의 눈이 두려운 '중국 내 탈북자' 생활은 먹을 것을 찾아 떠돌던 북한에서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산둥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을 돌며 13년을 숨어 살았다.

 

정희씨는 그러다 한국행을 생각했다. 한국의 '납북자 가족모임' 등이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구출한다는 소식을 중국에서 들은 게 계기가 됐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한을 풀려면 저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작년 10월 정희씨는 '한국행'을 실행에 옮겼다. 선양(瀋陽), 정저우(鄭州), 쿤밍(昆明)을 거쳐 태국에 들어갔고, 작년 11월 25일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

 

지난 4월 하나원(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무소)을 나온 정희씨는 최근까지 부산에서 일했다. 일당 5만~6만원을 받는 잡일을 하며 150만원을 모았고, 지난 8월 드디어 아버지 고향 흑산도를 찾아갔다.

 

하지만 친척들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민들은 "7남매였던 형제들이 종근·종석씨 납북 후 '빨갱이 가족'이란 누명을 쓰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어렵사리 수소문해 연락이 닿은 사촌오빠는 정희씨에게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선장이 되고 싶었지만 종석씨 일이 걸림돌이 돼 꿈을 접어야 했던 또 다른 사촌 오빠는 아예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정희씨가 흑산도를 찾던 날 고향 마을엔 종일 비가 내렸다. "아버지 눈물 같았어요. 아버지는 고향에 제가 간 게 대견하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론 딱하지 않았겠어요? 한국 와서 첫 추석을 맞았는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엔 결국 찾아가 뵙지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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