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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문한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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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25회 작성일 12-10-0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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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초대석]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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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PHOTO/ 이현기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증언하는 최성용 납북자 가족모임 대표.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6.25 전쟁이후 한국인 납북자는 500명이 넘습니다. 또 7만5천여명이나 되는 국군포로 실종자 중에 560여명이 아직 북한에 살아 있는 것으로 한국 통일부는 추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는 50여년간 한국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 이 문제는 언론에 자주 보도되면서 정부와 여론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납북어부들의 가족이 중심이돼 만들어진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가 납북자와 국군포로 또 그 가족들을 탈북시키면서였습니다.
 
그 자신 45년전 북에 납치된 어부의 아들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관심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북녘땅에 억류된 납북자를 구출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난 12년 동안 구해 낸 납북자와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은 70여명. 그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과 유엔을 통해서도 납북자 송환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억류된 오길남 박사의 가족 송환을 미국 정부와 의회에 호소하기 위해 9월 워싱턴을 방문한 최성용 납북가족모임 대표를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납북자가족모임은 언제 시작됐습니까?
최성용: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제가 납북자 송환운동을 하면서 만들었습니다. 2000년 4월에 발족했습니다.
 
전: 벌써 12년 넘었네요. 납북자가족모임을 이끌고 있는 대표로서 전후 납북자는 모두 몇 명으로 파악하고 계십니까?
최: 처음에 납북자 송환운동할 때에 정부가 발표한 것은 457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국민에게 납북자 문제를 알리기 위해 북한에서 납북자 국군포로의 탈출을 돕기 시작했고 많이 한국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도 납북자/국군포로에 관한 소식(정보)이 들어오고 정부도 자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또 새로운 납북자가 밝혀지면서 제가 확인한 바로는 현재 517명입니다.
 
전: 추가로 근래에 납치된 사람에 대한 정보는 있습니까?
최: 간혹 있었죠. 미국 여기자들이나 동해상에서 어부들이 끌려갔다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에서 기획적으로 납북하는 사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전: 납북자라면, 우선 최 대표의 부친과 같은 어부, 또 대한항공 승무원 승객 등이 우선 생각나는데요 어떤 직종의 사람들입니까?
최: 517명 중에 93퍼센트가 어민입니다. 일본인 메구미 남편을 포함해 학생이 5명이고요. 군인도 있고 KAL대한항공기 승무원, 그리고 미국 영주권 갖고 있는 김동진 목사도 포함돼 있습니다.
 
전: 517명의 납북자 중엔 오길남 목사 가족도 포함돼 있습니까?
최: 1989년 국정원에서 처음으로 납북자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거기에 신숙자 혜원 규원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월북인이라는 주장은 삼가해야 합니다.
 
전: 그러니까 분명히 납북자 명단에 들어있다는 말이네요.
최: 네. 그뿐 아니라 신숙자 모녀는 ‘강제 억류자’라로 분류돼 있을 겁니다.
 
전: 납북자가족모임에서 2012년 1월에 북한 내부인을 통해 입수했다는 2008년 조선적십자회의 문건에 따르면 오길남박사의 부인 신숙자씨는 연락두절로, 두 딸 혜원과 규원은 생존자로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또 올해 6월 15일에는 최 대표께서 북한 내부 소식통의 자료를 인용해 신숙자씨가 2008년 11월 23일 간경변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면서 이 자료는 평양 보건성 관련기관에 보관된 신 씨의 사망확인서의 필사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사망확인서 필사본이란 건 무엇인가요?
최: 그건 저희 북한 내 소식통이 본 문서를 그대로 베껴 온 것입니다. 거기 필사본에는 납북자들의 생년월일과 출생지가 모두 적혀 있습니다. 신숙자 모녀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납북 어부, 국군포로,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 것까지 다 들어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전: 최 대표께서는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한 뒤 윤이상씨의 부인 이수자씨가 조문한데 대해 이를 규탄하고 통영의 딸 송환에 동참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12월 30일 열었습니다. 통영의 딸과 오길남 박사의 얘길하자면 항상 뒤 따르는 얘기가 그분들을 월북 회유했던 윤이상 작곡가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는데요, 윤이상 작곡가의 부인 이수자씨는 독일 시민권을 갖고 있 으면서도 한국 통영에 집이 있고 그런가하면 북한 평양에도 저택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최 대표께서는 회견에서 ‘이수자씨가 김 국방위원장 조문할 때 통영의 딸들은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고도 말씀하셨는데 윤씨의 부인 이수자씨의 행보에 대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 저는 피해자 입장에서 통영의 딸이 북한에 억류된 상황이 가슴 아플 일인데, 어떻게 이수자씨가 서독과 평양과 통영에 저택을 두고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면서 김정일을 조문할 수 있습니까? 오길남 박사는 통영의 딸의 생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이 씨가 한국에 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수자씨의 통영 주택을 가봤습니다. 그 앞에 서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떳떳하게 통영까지 와서 호화롭게 살고 있나? 제가 피해자 입장에서 가슴 아팠습니다.
전: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을 오길남씨의 가족과 현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이수자씨의 삶이 크게 대비가 됐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납북자가족모임에서 납북된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이 어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대표께서는 오길남씨의 가족- 신숙자 모녀를 구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 나서고 계십니다. 신숙자씨 모녀를 구출하기 위한 ‘통영의 딸 국토대장정’ ‘통영의 딸 임의적 구금에 대한 북한의 답변과 유엔의 답변에 대한 기자회견’ 등에 참여하셨고 또 7월 20일에 출범한 ‘통영의딸 송환 대책위워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9월에는 통영의 딸 송환을 위해 방미활동을 하시는데 오길남 박사 가족의 생사확인과 구명을 위해 적극 나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최: 저는 요코타 메구미 남편이 한국 학생이란 걸 2004년에 공개한 다음에 그의 dna 검사를 비밀리에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그 결과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제 제의를 받아들여 공동으로 dna 검사를 해서 요코타의 남편이 김영남이란 사실을 저와 공동으로 발표했습니다.
 
전: 청취자들을 위해 김영남이란 인물을 잠간 소개해 주시죠.
최: 김영남은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남파 간첩에 끌려 간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북에 잡혀 가 있던 메구미와 만나 서로 일본어와 한국어를 배우고 하면서 정책적인 결혼을 했겠죠.  우리 남한 학생입니다. 저는 일본이 메구미 구명운동 하는 걸 보고 감명받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습니다. 저는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많이 구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 문제에 대해 굉장히 떠드는데도 왜 구명운동이 한국에서는 안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정부의 무능에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국민의 호응을 어떻게 하면 끌어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 분의 여성 사진, 요덕수용소에서 찍은 오길남박사의 부인 신숙자씨와 두 딸 혜원, 규원의 사진입니다. 그게 윤여상 박사가 줬다는 사진입니다. 저희가 납북자 문제로 시위할 때 시민들이 오 박사 가족 송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아쉽다고 말하더군요. 더욱이 피해자들이 여성이니까 더 그렇게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또 오 박사님과 가끔 대화를 하면 대단한 지식인인데도 매우 순하십니다. 저 분이 얼마나 살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또 그 가족이 517명의 납북자 명단에 포함돼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보고자 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다보 평양 쪽에서 신숙자씨와 혜원 규원에 대한 소식이 가끔 흘러들어 오기도 해서 발표도 했습니다. 박사님도 저와 같이 의지하면서 일하시고요. 중요한 것은 신숙자 모녀의 구명운동을 우리 납북자 전체 구출운동의 상징으로 해보자 하는 차원에서 동참하게 됐습니다.
 
전: 최 대표님의 부친 최원모씨는 풍복호의 선주로 1967년 여름 연평도에서 조업하다 북조선 무장선들에 포위 납치됐습니다. 벌써 45년전의 일인데요. 올해 3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산하 ‘임의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에 부친의 강제구금 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셨는데요.
최: 네. 우리 납북자 중에 신숙자씨 혜원과 규원, 대한항공 피랍 승무원 3명 등 6명이 유엔 임의적구금실무그룹에 청원돼 있습니다. 그 중에 신숙자 모녀에 대해서는 북한이 답변을 했고. 대한항공 승무원 피랍자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답변을 안 해준 상황에서 관련 인권단체에서 제 부친의 것을 해보자고 제의했습니다. 이미 사망 소문은 있었지만 –그래서 먼저 제 부친의 것을 신청했고 계속해서 피랍 학생들 것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전: 그런데 최 대표의 부친은 1970년쯤 평안북도 정주역 부근에서 공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요,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최: 네. 저는 제가 납북자 구명운동을 시작할 때 아버님이 처형당해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유해를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추진했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 유해를 꼭 모시고 오라고 했죠. 아버님은 원래 평북 정주 출신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건 꼭 성공시켜야겠다고 다짐하고 일을 했지만 아버님 유해는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에 있는 납북자와 국군포로들의 주소 등의 정보가 저에게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망하셨다는 아버님 보다는 일단 국민들에게 살아있는 분들을 데려오자 하는 생각에 운동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탈출시켜주는 일을 시작하다 보니 아버님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아버님과 같이 억류된 사람 중에 간첩교육을 받고 다시 남파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한국에서 잡혀 20년 징역을 살았는데 한국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그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아버님이 6.25 전쟁 때 맥아더 사령부 8240켈로부대의 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공개처형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은 북한 내 저의 정보원들에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아버님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전: 그런데 다른 납북된 어부들의 청원서도 준비 중에 있나요?
최: 네. 제 아버님 것은 이미 청원서가 제출돼 유엔 임의적구금그룹에서9월에 북쪽에 통보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납치된 문경식씨란 분과 1968년 여름 오징어잡이 배 덕수 2호 어부들 그리고 공무원 피랍자 최장근씨, 또 피랍 학생들에 대한 구금여부 확인 청원서 관련 서류는 그 준비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유엔에 머지않아 제출할 겁니다.
 
전: 요덕수용소 출신의 탈북자 강철환씨는 여동생을 그리고 개천 완전통제구역 출신의 탈북자 신동혁씨는 아버지의 강제구금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청원서를 4월 제출했다죠?
최: 네. 저의 부친의 청원서와 함께 했습니다.
 
전: 아직 답변은 없는 것이구요?
최: 네. 저희 아버님, 그리고 강철환씨 신동혁씨의 가족과 오 박사님 가족과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 박사님 케이스는 북쪽에서 자기들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답변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입장이 불편한 것은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전: 근데 국군포로 한만택씨와 납북어부 강여진, 이기하, 윤삼문, 박상원씨 등의 사망확인서 필사본도 같이 입수하셨다고 하던데 이들의 사망 원인이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최: 신숙자씨의 경우 간경변으로 돼 있었는데 오 박사님도 그건 인정하셨습니다. 원래 간이 안 좋으셨다고 합니다. 다른 분들의 사인은 교통사고나 이상하게도 심장마비 등으로 돼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정확한 소식을 알아 보니 굶어 죽은 사람도 2명이나 됐습니다. 하지만 북쪽의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전: 그러니까 북한의 기록이 모두 사실은 아니란 말이네요.
최: 그렇습니다.
 
전: 일본인 피랍자 ‘요코타 메구미’ 씨에 관해 지난 8월 27일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메구미의 딸 김은경(24세)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 특별히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김여정이 관리하기 시작한 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후 김정은의 특별지시에 따른 것이다.’  특별관리를 하도록 지시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최: 은경이는 김일성 종합대학교에서 컴퓨터를 전공했습니다.
 
전: 그렇다면 보살핌을 잘 받았다는 얘기네요.
최: 당연하죠. 그리고 2006년도 이산가족 상봉장에 김영남이 나와서 기자회견까지 했습니다. 당시 김영남의 후처 박춘화의 부친, 즉 김영남의 장인이 평양시 당 위원장이었습니다.
 
전: 그러니까 메구미는 사망했고 그 다음에 재가를 해서 새로 얻은 북한여성의 아버지가 당 간부였다는 거죠?
최: 네. 그리고 영남이는 잡혀 간 다음에 하루 3시간만 자면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일은 김영남을 자식처럼 대해 줬다고 하고요.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김영남의 어머니 최계월씨에게 북쪽이 선물 2가지를 줬습니다. 김정일의 하사품인데요. 하나는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딱지 붙은 휠체어 –그러니까 미국에서 제조한 장애자가 타는 휠체어 –그걸 태우고 김영남이 기자회견 했잖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어머니 건강을 챙기라고 보낸 백년 묵은 산삼.  이렇게 두 가지를 선물했습니다. 그것만 봐도 그 아이(김영남)를 그만큼 보호한다는 거죠.
 
전: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김영남을 프로파간다, 선전 선동에 이용하겠다는 속셈이었네요.
최: 네. 또 그만큼 김영남이 북에 충성을 하겠죠.  그다음, 김정일 아들인 김정은이 통영의 딸이나 메구미 문제가 제기됐을 때 어떻게 할지를 한 번 생각해 보죠. 앞으로 대외적으로 협상할 때 메구미 딸 은경이는 일본 쪽에 대해서 큰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혜원이 규원이는 한국 쪽과 협상할 때 얼마나 보물단지같겠습니까? 앞으로 유리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말한 북한당국의 특별감시라는 걸 일본 언론이 잘 못 쓴 부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잘 해주고 특별 관리해 준다는 말이었는데 일본 언론에서는 그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쓴 기사도 있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전: 그렇다면 오길남씨의 두 딸도 특별관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최: 특별관리하고 있다는 건 정확한 사실입니다.
 
전: 그렇다면 평양 근처에 있다는 얘기가 맞습니까?
최: 맞습니다. 강제 결혼도 시켰을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박사님도 맞을 것 같다고 공감하십니다.
 
전: 지금까지 최성용 대표께서 구출한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모두 몇 명입니까?
최: 납북자는 8명이 탈출해 한국에 왔습니다. 그 중에 7명을 제가 모시고 왔고 국군포로는 90명이 탈북해 오셨는데 그 중에 12명을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북쪽에서 낳은 가족 2세는 50분정도 모시고 왔습니다. 이들 모두 연로해 사망하신 분들 빼고는 고국에 정착해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전: 최 대표 모친께서는 2005년 사망하신 걸로 압니다. 아버님을 혹시 기다리시기도 하셨을텐데 평소 하시던 말씀이나 유언이 있습니까?
최: 제가 15살에 아버님이 북으로 납치됐습니다. 지금 저는 환갑입니다. 순식간에 45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납북자 운동을 시작해 사람도 구출해보고 떠들어 보기도 하고, 금강산에도 들어가 시위도 해 보며 별짓 다해봤습니다. 그래도 내 아버지 뼈는 갖고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살아 있는 한 그건 내 책무입니다. 그러면서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는 자국민보호 문제라는 걸 국민에게 계속 심어주는 것이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9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방문한 납북자국군포로 송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와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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