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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拉北者가족모임」 대표 崔成龍씨, 금강산에서 제사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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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105회 작성일 04-10-26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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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3년 10월호]
『이해합니다. 가족이 서로 헤어진다는 건 정말 크나큰 비극이지요. 그 심정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 체제에 대해서는 이해라는 게 불가능하니까, 우리가 맞고 당신네가 틀렸다는 식으로 서로 말할 수 없겠지만, 가족 차원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금강산 북측 안내원의 말)

崔再卿 자유기고가



재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는 광화문 현대 사옥 앞에서 관광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가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일반에 허용된 첫 금강산 陸路(육로)관광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첫해였던 1999년 4월 봉래호를 타고 눈이 녹지 않은 금강산에 다녀와, 그때의 靈感(영감)으로 소설을 쓴 적도 있던 터라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게다가 좋은 동행까지 있었다. 「납북자가족모임」의 崔成龍(최성용·51) 대표와 「피랍·탈북자 인권과 구명을 위한 시민연대」의 都希侖(도희윤·36) 사무총장이었다. 崔회장은 1967년 납북된 父親 崔元模씨의 북한內 행적을 찾다가 납북자가족모임의 대표를 맡게 되었고, 이재근·진정팔·김병도씨 등 납북 어부들을 중국을 통해 구출해 왔다.

두 사람은 8월 초 금강산에 가기로 예약되어 있었으나 鄭夢憲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여행길이 막혔다가 다시 잡힌 날짜가 9월1일이었다. 都希侖 사무총장은 그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 9월2일이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북한에 송환한 지 3년째 되는 날인데, 바로 그날 우리가 북한에 가게 된 것이 묘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자인 비전향 장기수들은 소원대로 북한에 돌아가는 판국에, 남한의 납북자 가족들은 북한으로 끌려간 가족의 생사 확인조차 하지 못한 아픔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지난 6월, 한국전쟁 당시 납북자 8만여 명의 인적사항이 담긴 CD롬과 戰後 피랍자 486명의 명단을 들고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찾아간 바 있다. 납북자 문제가 남북관계에서 민감한 話頭인 만큼 두 사람의 금강산行은 초장부터 애로사항이 많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러 단체에서 전화가 걸려와 뜯어말리더란 것이다. 「요주의 인물」인 그들과의 동행이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이 못 가더라도 나는 갈 것이었다.


확약서 제출

9월1일 오후 1시30분, 남측 CIQ(임시남북출입관리연락사무소)로 가기 직전 집결지인 강원도 고성군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관광증을 찾고 배정된 組(조)를 확인하게 되어 있었는데, 내 관광증만 보이지 않았다. 현대아산 담당자에게 확인을 요청하자 어디선가 직원 한 명이 나타나 나에게 『현대아산의 모 부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커피숍에 앉아 현대아산의 부장을 기다렸다. 잠시 후 崔회장과 都총장도 커피숍으로 불려 왔다. 현대아산 부장이라는 사람이 「確約書(확약서)」를 내밀었다. 확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금강산 지역에서는 관광일정 및 안내를 준수하며 이를 이탈하여 남북교류 및 공공질서, 국가안전보장, 공공복리를 저해하는 등 관광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진 행위를 하지 않겠습니다. 상기 확약에 벗어나는 언행으로 관련 법규 및 남북교류협력 질서를 해치거나 현대아산(주)에 불이익이 발생할 경우 모든 민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개시된 이래 확약서를 쓰고 관광을 한 경우는 한총련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남북교류 및 공공질서, 국가안전보장, 공공복리를 저해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누명을 쓰는 것이 억울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확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제서야 부장은 누런 서류봉투에서 우리 세 사람의 관광증을 꺼내 주었다.

오후 3시경 남측 CIQ에 도착하여 검색대를 통과하자 북한을 향해 열린 통문 앞에 「금강산 육로관광」이라는 팻말을 단 흰색 버스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관광객들은 노인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육로관광 첫날이어서인지 방송국 기자들과 카메라맨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호주에서 왔다는 외신기자단도 있었다. 都총장이 통일운동 협의체인 「民和協(민화엽: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핵심인물과 인사를 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량은 「호텔 해금강」이나 「금강 빌리지」 같은 숙박 장소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예비 1」, 「예비 2」라는 표지를 달고 있었다. 아마 정부 차원에서 북한 측 단체와 무슨 행사를 하는 데 참석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 일행 중에 젊은 국회의원 L씨 얼굴이 보이자 崔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민화협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금강산에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날한시에 떠나면서 누구는 환영받으면서 가고, 누구는 범죄자 취급받으며 확약서까지 쓰고 가다니 정말 아이러니 아닙니까』


北에서 온 팩스 한 장

崔회장이 금강산行을 선택한 것은 36년 동안이나 拉北된 남편을 기다리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위독한 상태에 접어든 팔순 老母(노모)를 위해서였다.

『치매는 아니지만, 이제 시간이 다 돼 가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더 이상 못 기다려요. 어제는 평생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지 아버지 욕을 막 하시더라구요』

崔회장의 어머니 金愛蘭(김애란·80)씨는 2002년 4월 제4차 이산가족 상봉 때 남편과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금강산을 방문했으나 두 여동생만 만났을 뿐 남편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이 있기 전 북한에서 날아온 팩스에는 崔회장의 아버지 崔元模씨의 「생사여부」란에 「확인 불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상봉 첫날 동생들이 『언니, 어서 통일이 되어야지요. 통일은 金正日 장군의 의지로 됩니다』라고 말하자, 金여사는 『그게 아니다. 통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일이다』라고 답변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金여사는 상봉 이튿날 공동 점심식사 도중 남편의 사진과 납북된 풍복호 사진을 꺼내 『남편을 돌려 달라. 죽었으면 忌日(기일)이라도 알려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北에서 온 두 여동생은 울부짖는 언니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金여사는 금강산에 다녀온 후 건강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崔회장의 아버지 崔元模(최원모·93·납북 당시 57세)씨는 평북 정주가 고향으로서 6·25 당시 북한에서 켈로부대(KLO: 미군이 한국전 당시 활용했던 對北 첩보부대) 요원으로 미군을 도와 공산군과 싸운 경력이 있다고 한다. 崔회장의 아버지는 선주였으나 마침 선장이 개인 사정으로 출항할 수 없게 되자 직접 배를 몰고 어로작업을 나갔다가 연평도 근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 그 후 같은 배를 타고 납북됐던 어부들 중 일부는 송환됐다. 崔회장은 아버지가 월남자인데다가 6·25 당시 인민군과 싸웠던 과거의 경력이 드러나 송환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 그는 납북어부 구출과정에서 탈북자들에게서 『아버지가 켈로부대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드러나 심하게 구타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달라진 북한 안내원들

오후 4시 정각에 버스는 비무장지대(DMZ)를 가로지르는 2차선 도로를 줄지어 달리기 시작했고 오후 5시30분경 고성항의 북측 CIQ에 도착했다. 남측 CIQ에서 북측 CIQ까지는 약 39.4km였다. 스피커에서 북한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1999년 4월의 얼어붙은 표정의 인민군들이 늘어서 있던 고성항을 생각하니 같은 장소라고 믿기 어려웠다.

오후 6시에 入北심사를 마?관광객들은 호텔 해금강에 도착했다. 천불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7층 규모의 호텔 해금강은 싱가포르에서 들여온 船上호텔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특별감시 대상이었다. 조장들의 무전기를 통해 『그 세 사람…』 운운하며 특별히 당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금강산 온천에서 온정각까지 400여m의 길을 관광객이 도보로 걸어다닐 수 있다고 했다. 그 길은 중간 지점에서 북한 주민들이 사는 온정리 마을로 가는 길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4년 전에 비해 옷을 잘 차려 입은 북한 어린이와 어른 남녀들이 자전거를 끌며 그 길을 지나다녔다.

9월2일 아침,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만물상과 구룡폭포 코스 중 선택하여 관광할 수 있다고 했다. 구룡폭포의 경우 4년 전에는 구룡연까지 갈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너머 상팔담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비가 오므로 비교적 완만한 구룡폭포를 택했다.

비가 와서 앞만 보고 걸어야 하는 구룡폭포 길은 설악산을 비롯한 남한의 산들에서 보는 골짜기나 계곡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번 관광 때는 금강산을 처음 밟아 본다는 감격만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다. 편편한 바위마다 새겨진 金日成 칭송 글씨들은 여전했는데, 북한 사람들은 이를 「글바위」라 부른다. 금강산에 있는 글바위만 대략 4370여 개가 된다고 했다.

북측 안내원들의 변화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1999년 4월에는 금강산에 눈이 남아 있을 때였는데도 북측 안내원들의 옷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값싼 작업복 천으로 된 홑겹의 옷에다 머리수건, 비닐장화나 비닐 슬리퍼(남한에서는 욕실용으로 쓰이는), 화장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긴장된 표정이 특징이었다.

2003년에 그들은 비교적 세련된 디자인의 옷을 입었으며, 여성들의 경우 면으로 된 운동복 상의를 겉옷처럼 걸친 것이 특징이었다. 남한에서 10여 년 전에 유행했던 디스코 바지(윗부분은 헐렁하고 발목 부위는 좁은 바지)풍의 활동하기 편한 바지에 끈 달린 운동화나 굽 낮은 구두, 줄무늬 남방셔츠 등을 입고, 머리는 남한에서 유행하는 곱창핀으로 묶거나 장식방울이 달린 고무줄로 묶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 안내원들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에 검은 마스카라를 칠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런 표정으로 활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현대아산 가이드들이 보이면 농담을 걸거나 장난을 치기도 했다. 金日成이나 金正日 표식비에 앉거나 손가락질을 하면 예전엔 벌금을 물었는데, 이제는 그냥 『그러지 마십시오』 하는 정도의 주의만 주었다.


구룡폭포 앞에서 부른 亡父歌

현대아산 측의 고참 가이드가 뒤쳐져 걸어가는 崔회장의 동행이 되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작년 여름 태풍 「루사」로 인해 금강산에도 900mm 가량의 暴雨가 쏟아졌고, 겨울에는 暴雪이 6m나 내려 많은 死傷者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금강산의 다리가 모두 끊어지고 바위들의 위치도 바뀌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바위들이 물과 눈에 씻겨 때가 다 벗겨지고 새하얀 색깔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북측 안내원들이 그 가이드에게 아는 척을 하거나 농담을 건넸다.

崔회장은 현대아산 측 가이드에게 지난해 어머니가 금강산에 다녀간 사실,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사실을 설명했다. 살아 계신다 해도 93세라는 고령이 되었을 아버지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확률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崔회장이었다. 崔회장이 금강산에 간 것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잃고 살아온 세월 동안 가족이 겪은 아픔과 恨을 풀기 위해서로 보였다.

崔회장이 구룡폭포에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자 가이드는 『그건 정치적인 행동 아니냐』며 당황했다. 崔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제사가 어떻게 정치적인 일인가』라며 맞섰다. 몇 번을 말렸으나 崔회장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사실을 알자 가이드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자리를 잡아 주겠다』고 했다.

가이드는 구룡연을 마주보고 지어진 전망대의 아래쪽 길로 崔회장을 이끌었다. 가이드는 崔회장에게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제안했으나 崔회장은 거절했다. 전망대의 좋은 자리에서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대신, 관광객들이 모두 내려간 후에 지내겠다고 했다.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모두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崔회장은 간소한 제사상을 차렸다. 전망대 난간에 소주 한 병, 삶은 달걀 두 개, 오징어포를 차린 후, 북한에서 팩스로 받은 아버지의 생사확인서를 펼쳤다. 아버지는 평소에 삶은 달걀을 유독 좋아했다고 했다.

아무리 납북자 여럿을 탈출시킨 崔회장이라지만, 북한 땅인 금강산에서 그런 일을 결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이드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켜보았고, 불과 5m 떨어진 뒤편 벤치에 북측 안내원 세 명이 앉아서 일부러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바라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崔회장은 절을 한 다음 都총장과 함께 달걀 껍질에 부은 소주를 飮福(음복)했다. 崔회장은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납북자 가족들의 아픔이 한시라도 빨리 해결될 수 있기를 빌었다고 했다.

제사가 끝난 후 상팔담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 남측 실향민 관광객 한 명이 崔회장에게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崔회장이 아버지의 납북 경위를 설명하며 생사확인서를 보여 주자 그 관광객은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저런 때려죽일 놈들』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북측 안내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이산가족 찾아오는 남한 사람들 보면 괘씸합니다』

崔회장은 올라갈 때보다 기운이 빠져 보였다. 안개가 걷힌 산자락을 내려오다 보니 중간 지점쯤에서 앞서 내려갔던 都총장이 북한 안내원들과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곳에는 40代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안내원과 20代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안내원이 함께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안경을 쓴 40代 안내원은 崔회장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崔회장은 아버지 고향이 평북이라고 했다. 崔회장이 작년에 어머니가 금강산에 동생들을 만나러 왔다가 탈진하여 도중에 실려 갔다는 얘기를 하자 안내원은 『TV에서 봤다. 그 할머니가 당신 어머니냐』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산가족 찾겠다고 북쪽에 오는 남한 사람들 보면 괘씸한 생각이 들어요. 저 혼자 잘 살겠다고 내려갈 땐 언제고, 이제 먹고 사는 건 문제없고 다 늙어서 고향 생각나니깐 그제서야 부모 형제 찾아오는구나 하고』

안내원은 崔회장의 아버지가 평북에 계속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는 아버지가 뭘 하던 사람이냐고 물었다. 崔회장이 이렇게 답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랑 월남해서 남한에서 배를 두 척이나 가지고 아주 잘 살았어요. 나는 부모님이 월남할 때 어머니 뱃속에 있었구요. 그래서 내가 1952년생이오』

안내원이 『그런데 왜 아버지가 북한에 다시 오게 됐냐』고 했다. 崔회장은 아버지가 1967년에 조기잡이를 나갔다가 북한으로 납치됐고, 그 후 다른 어부들은 돌아왔는데 아버지만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안내원이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걸 TV에서 본 것 같아요. 남한 배들이 서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들어온 것 같은데…』

안내원은 그것이 납치가 아니었다고 했으나, 崔회장은 『그것은 엄연한 납치였다』고 강조했다.

『물론 풍랑을 만나 자기도 모르게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집에 올 때면 가방이 꽉꽉 차도록 돈을 벌어 왔던 분인데 뭣 때문에 북한으로 갔겠어요. 가족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러니 우리 가족이 받은 충격과 슬픔이 어땠겠어요. 그 일 때문에 가족이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어요. 내가 당신네 지도자 분들 비난하려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건 「납치」였어요. 남한 정부에서 공식으로 밝힌 납북자 명단만 500명이 되는데요』

아무리 금강산 숲 속이라지만 「납치」라는 말은 안내원들을 곤혹스럽게 할 만한 발언이었지만 안내원이 이렇게 말을 받았다.

『이해합니다. 가족이 서로 헤어진다는 건 정말 크나큰 비극이지요. 그 심정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 체제에 대해서는 이해라는 게 불가능하니까, 우리가 맞고 당신네가 틀렸다는 식으로 서로 말할 수 없겠지만, 가족 차원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안내원은 崔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뒤늦게 내려온 현대아산 측 가이드도, 멀찌감치 듣고 서 있던 북측 안내원도, 崔회장과 都총장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내원은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면서 崔회장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崔회장은 자신의 이름 석자를 말해 주고 산을 내려왔다.

『여기가 북한 맞습니까? 어떻게 「납치」라는 말을 꺼냈는데 「이해한다」고 하며 넘어갈 수 있습니까?』

崔회장은 안내원을 뒤로 하고 내려오며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잠시 우리 곁을 떠나 그 안내원을 만나고 돌아온 현대아산 측 가이드는 그 안내원이 꽤 痔㎞?높은 고위층 간부라고 귀띔해 주었다.


『남조선, 북조선이라 말씀하지 마십시오』

구룡폭포에서 내려와 북한음식점 「목란관」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은 비빔밥과 냉면 두 가지였다.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스커트와 조끼를 입고 주문을 받는 「접대원」들은 하나같이 미인이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관광객들이 매니저로 보이는 접대원에게 옆에 있는 남한 젊은이를 가리키며 『남편감으로 이 총각 어때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접대원은 『제가 시집 가기를 기원하기 전에 먼저 통일부터 기원하셔야죠. 저는 통일되기 전에는 시집 갈 생각 없습네다』라고 했다. 무색해진 관광객이 북한 말투를 흉내 내며 『남조선에서는…』이라고 말을 꺼내자 『남조선, 북조선이라 말씀하지 마십시오. 남측, 북측이라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남측, 북측이 두 나라라고 생각하기 싫습네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와서 아침에 만났던 현대아산 측 관계자를 만났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북한 측이 예전처럼 강경하게 굴지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나는 동안 서로 닮아 가게 된 거죠. 그것이 민간교류의 장점이 아니겠습니까. 여기 있는 북한 젊은이들은 이제 우리 유행가를 듣고 부를 정도예요. 사석에서 만나면 술도 마시고 친구처럼 이야기도 하고 그럽니다. 몇 년 전 우리 관광객 민영미씨를 구금했던 북측 관리자가 그 사건으로 숙청당했어요. 그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을 때의 경제적 손실 때문이죠. 몇 년간 금강산 관광을 통해 남측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관광객의 존재가 자기들 체제에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다고 판단한 거죠. 처음에 있었던 벌금제도나 철책도 많이 없앴습니다. 실제로는 금강산을 남한에 내준 거나 마찬가집니다』

해금강에서 다시 온정각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북측 CIQ를 거쳐 남측 CIQ로 되돌아갔다. 남측 CIQ로 돌아오자 우리에게 확약서를 받았던 현대아산 부장이 멀리서 눈인사를 건넸다. 崔회장은 금강산에서 납북된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행위만으로도 며칠간 억류나 구금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의 안내원이 마지막으로 제 이름을 물었을 때, 곧 구금될 줄 알았는데 무사히 넘어간 것이 놀랍습니다. 그들이 나를 그냥 보내 줬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가진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타협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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