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이산가족은 천륜의 문제··· 보여주기식 상봉이 아니라 생사확인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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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룡 납북자 가족 대표,
“이산가족은 천륜의 문제··· 보여주기식 상봉이 아니라 생사확인 절실”
글 : 조선일보 이산흔 기자
지난 6월 9일 인천시 중구 용유도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에서 열린 '납북자 516명 무사귀환 및 KLO 8240 유격백마부대 552위 제66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사진: 최성룡 KLO 8240 유격백마부대 회장 제공 |
“이산가족 생사확인을 요구하지 않는 남북대화는 무의미합니다. 70년이 넘도록 부모·형제의 생사확인조차 해주지 않는 건 너무 잔인한 짓 아닙니까? 사람이 자기 부모의 제삿날은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또다시 100명씩 선별해서 하는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된다면 명단에 들지 못하는 가족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최성룡 납북자가가족모임대표(65)의 말이다. 그는 “그동안 100명씩 선별해 추진해온 이산가족 상봉은 이산가족 문제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보여주기식 쇼”라며 “생사확인을 외면한 채 천륜(天倫)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온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 모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66주기 유격백마부대 희생자 추도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그는 KLO8240 유격백마부대 회장과 (사)전후납북피해가족총연합회 이사장도 맡고 있다. 뒷편 현수막에 ‘천륜어기고 살 수 있나. 이제 생사확인하자!’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2000년 4월 납북자가족모임을 결성한 이후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최성룡 대표는 납북자 문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켈로부대 8240 유격백마부대 회장과 (사)전후납북피해가족총연합회 이사장도 겸하고 있는 그는 “올해 6월이 저의 아버지가 납북된 지 꼭 50년이 되는 해”라며 “문재인 정부가 남북대화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이 전제되는 진실한 남북대화를 추진했으면 한다”는 심경을 나타냈다.
최 대표의 부친인 최원모씨는 1967년 6월 7일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 납북됐다. 최원모씨는 6·25 전쟁 당시 켈로부대 대원으로 이 부대 소속의 ‘북진호’ 함장으로 서해 도서지역을 오가며 유격전을 벌여 적선을 섬멸하고, 중공군 포로와 식량을 노획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이들 켈로부대원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 2016년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다.
당시 북한은 최원모씨를 비롯하여 납북한 선원 8명 중 5명의 선원을 돌려보냈지만, 최 씨는 북한에 억류되었다. 나머지 두 명 중에 한 명은 이후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었고, 나머지 한명은 북한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최원모 씨는 켈로부대 출신으로 밝혀져 다른 선원과 달리 송환이 되지 못했다.
최성룡 대표는 “탈북자 등을 통해 아버지가 1970년 북한에서 인민재판에 넘겨져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북한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해주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 김일성은 켈로부대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했습니다. 북한 출신들로 구성된 켈로부대원들이 북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미군과 국군에 전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전황이 불리해졌다고 생각한 겁니다. 전쟁 후 김일성은 켈로부대원들을 최고의 반역자로 간주했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희생된 것으로 전해는 들었지만, 저는 북한이나 남한 정부가 이 같은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앞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있는 이 부대 소속 대원들. 맨 가운데 안경 쓰고 경례를 하고 있는 이가 6·25 전쟁 65년 만인 작년에 명치 부위에서 포탄 파편이 발견된 김일용씨다. 그는 "몸 속의 파편이 훈장아닌 훈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켈로부대원 소속 유격백마부대원들은 해마다 인천시 중구 을왕동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앞에서 위령제를 올린다. 충혼탑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에도 세워져 있다. 작년에는 유격백마부대원 출신인 김일용(84)씨는 발목 골절로 병원을 찾았다가 명치 부위에서 6·25 때 박힌 포탄 파편(가로 8mm, 세로 6mm, 두께 2,2mm)이 발견되기도 했다. 김씨는 17세에 군번과 계급도 없이 켈로부대에 편입되어 평북 철산군 대화도에서 수색과 연락 임무를 맡았다. 작전 수행 1년 뒤 중공군의 역습으로 폭격을 피해 대화도를 빠져나왔지만, 후퇴 중 날아든 포탄에 정신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아군의 선박을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65년 만에 발견된 파편은 당시에 박힌 것이다. 최성룡 대표의 어머니인 김애란(2005년 작고)씨도 켈로부대원 출신이다. 최씨의 아버지처럼 평북 정주가 고향인 김씨는 6·25 때 유격백마부대에 합류해 그곳에서 남편 최원모씨를 만났다. 최성룡 대표는 “올해 2월 국방부로부터 6·25 참전 유공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참전사실 확인 통보서를 받았다”며 “어머니는 평생 납북된 아버지와 다른 납북자들만 걱정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최 대표가 납북자 송환 운동에 띄어 든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이인모씨를 비롯하여 ‘비전향 좌익 장기수’ 수십 명을 북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본 최성룡 대표의 어머니 김애란씨는 울분을 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느냐? 한 명의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돌려보내라는 요구하지도 않고, 어떻게 장기수를 돌려보낼 수가 있느냐? 이건 잘못되었다. 네가 아버지의 유해라도 찾아와라 어머니의 말을 들은 최성룡 대표는 그때부터 납북자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고, 지금까지 본인 손으로 직접 구출해 온 납북자가 8명, 국군포로가 12명에 이른다. “어머니 오른쪽 허벅지에는 총탄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평생 자신이 켈로부대원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으셨어요. 우리 형제들이 어머니에게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자고 하면, 어머니는 ‘상이군인도 아닌데 뭣 하러 그런 걸 하느냐’며 나무라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국가유공자시고, 우리 삼 형제도 현역 복무를 마쳤으니, 우리 가족이야말로 병역 명문가라고 자부합니다.” 마지막으로 최 대표는 “북한이 독재자 3대에 걸쳐 천륜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우리 지도자들이 장단을 맞춰줬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이번 정부만큼은 진정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헤아려 생사확인과 서신교환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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