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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온전히 슬퍼도 못하는 납북어민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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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3회 작성일 22-01-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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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온전히 슬퍼도 못하는 납북어민 가족

 

몰랐다이 날이 마지막일 줄은, 간첩 낙인 찍힐 줄은, 나라마저 외면할 줄은

 

▲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이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납북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이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납북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가족을 잃고도 목놓아 울 수 없었다. 숨죽여 울고 또 울어야 했다. 가족 잃은 아픔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저 되돌아오는 건 이른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전부였다. 6·25 전쟁 이후 납북된 어민들의 이야기다.

그 주홍글씨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남아있는 가족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 일터도, 학교도 남아있는 가족들을 내몰았다.

납북됐지만 돌아오지 못한 어민들과 가족들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으로 납치된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노력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끝난 후 서해 앞바다에는 많은 어선이 몰려들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다 보니 어시장, 파시(波市)가 열리는 곳이 많았다. 파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이다. 이런 파시는 주로 흑산도를 시작으로 연평도에 이르기까지 서해안을 따라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금어장을 찾아 어선들이 서해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 서울 수협중앙회 남북피해가족 자료사진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서울 수협중앙회 남북피해가족 자료사진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서울 수협중앙회 남북피해가족 자료사진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서울 수협중앙회 남북피해가족 자료사진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그러나 황금어장에서는 1960~70년대 비극도 함께 이어졌다. 남과 북이 대치하며 사상 경쟁을 벌이면서 납북 어선들이 늘어나 선전용으로 활용된 것이다. 또 육지에는 존재하는 휴전선이 바다 위에는 없었다. '정전협정'에서는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선으로부터 각기 2후퇴해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남한 어선이 북한경계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납북도 나포되기도 했다. 결국 1977년 북한은 일방적으로 '200해리 경제수역 및 해상군사경계선'을 선포했다.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에 따르면 납북 피랍자는 3835명이다. 어선원이 3729명으로 가장 많고, 대한항공 납치 50, ·30, 기타 26명 등이다. 이 가운데 송환자는 어선원 3263, 대한항공 납치 39, 기타 8명 등 3310명이다. 또 탈북·귀환 어선원은 9명이다. 하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귀환자는 516명이다. 어선원이 457, 대한항공 납치 11, ·30, 기타 18명 등이다. 미귀환자 516명의 가족들은 오늘까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어렵고, '간첩' 가족이라는 굴레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 1967년 풍북호 납북 일주일 전 찍은 사진.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1967년 풍북호 납북 일주일 전 찍은 사진.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

미귀환자 516, 남북관계 걸림돌로 보면 안돼적극적인 일본 본받아야


▲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이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납북피해자에 대해 인터뷰 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이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납북피해자에 대해 인터뷰 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은 1967년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 납북된 '풍복호' 선주의 아들이다.

그는 납북 어부인 아버지를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납북자 송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1952년 인천 학익동에서 태어난 그는 만수동 미군부대에서 일했던 아버지 최원모씨가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배 사업을 하셨다고 회고했다.

당시 배 3척을 운영했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6·25전쟁 당시 켈로부대 소속으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그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였다.

이런 아버지의 느닷없는 납북으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월북'이라는 손가락질에 '빨갱이'라며 이웃은 물론 친척들까지 발길을 끊었다. 최 이사장의 형은 산업은행에 취직하고도 신원 조회로 일주일 만에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가족들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것은 오롯이 그만의 몫이었다. 정부 각 부처며,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유엔까지 그가 찾아 나서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국가가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니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중국에 들어가 납북자들에 대한 북한 정보를 빼내느라 고생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들었죠. 사진 한장에 400만원을 주고 구하곤 했죠. 사기당한 것도 많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국군포로 유해 송환과 납북어부 단체 기념사진 등을 구할 수 있었죠.”

최 이사장에 따르면 현재까지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는 83명으로 이 중 12명의 탈출을 그가 도왔다. 탈출을 도운 이들 중에는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납북 미귀환자들과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한 정부에 서운함이 크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동안 제가 대신한 겁니다. 점차 북한에 대한 납북자 생사 확인과 상호왕래 요구 등이 줄고 있어요. 이번 정부에서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한차례 요구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은 전후 납북자를 위한 법을 만들었어요. 인권운동으로 먼저 시작하라고 조언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 울먹여지곤 합니다.”

최 이사장은 납북 일본인 해결에 끊임없이 나서고 있는 일본을 오히려 교훈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지속해서 거론하며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에요. 납북자들에 대한 존재와 억울함이 잊히기 전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는 납북 가족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고 전했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됐다고 하나 아직도 존재합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연좌제가 있어요. 가족이 잡혀가도 잘살라고 지원해준 것이 아니라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았습니다. 이런 피해를 납북 가족들이 직접 증명해야 한다는데 그게 쉬운 일입니까. 납북 미귀환자 516명 중 피해 가족으로 인정받은 건 단 3명뿐입니다.”

해마다 6월이면 인천 중구 용유도 유격백마부대 충혼탑에서는 납북자 516명의 무사귀환을 위한 추도식이 열린다. 납북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70세가 된 최 이사장의 근심을 날로 깊어지고 있다. 여전히 답보상태인 납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이 끊길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유해를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지. 아버지와 합장을 해달라시던 어머니의 유언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납북자 문제에 있어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516명을 북한과의 관계 속 걸림돌로 볼 것이 아니라 자국민의 납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이은경 기자 lotto@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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