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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이 아픔 알아줘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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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509회 작성일 04-10-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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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가족모임 대표 최성용씨 인터뷰
[조선일보 김재은 기자]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53) 대표는 국가 인권위원회가 지난 29일 납북자 가족 인권 침해에 대한 실태파악과 특별법 제정을 당국에 권고한 것에 대해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납북자 가족들을 인정하고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줘서 기쁘고, 그러다보니 그 동안의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권고문에서 “납북자 가족들의 피해 사례는 발생 시점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데다 그동안 체계적으로 수집된 증거가 없어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지만 국가는 납북자 가족들의 피해에 대해 실태 조사를 벌이고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납북자 가족모임 대표로 2002년 11월에 국가인권위원회에 납북자 가족들의 인권 침해에 대한 진정을 제기했고, 작년 말 납북자가족모임 소속 할머니 10여명과 함께 납북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상경해 인권위에서 4박5일 동안 점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최씨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번 인권위의 납북자 가족들의 피해실태 조사와 특별법 제정 권고로 인해 납북자 문제 해결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6·25 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도 납북자 가족들이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연좌제로 고통을 당하거나 간첩 사건이 터질 때마다 붙들려가 온갖 고초를 겪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최성용씨가 중학생이었던 1967년, 그의 아버지 최원모씨는 어선 풍복호를 타고 서해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을 하던중 다른 선원 8명과 함께 납북된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최씨는 “연좌제가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납북자 가족들에게 그림자처럼 덧씌워져 있었다”?말했다. 그는 “1980년대까지도 정부는 납북자 등 북한에 연관된 가족들은 빨갱이로 봤었다”며 “지금은 좋아졌지만 친척들까지 납북자 가족들을 외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최씨 또한 납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현역 군입대까지 제한을 받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에 가기 위해서 신체 검사를 받았는데 납북자 가족이니 귀향해서 방위를 하라고 했다”며 “논산 훈련 소장을 찾아가 강력하게 요구한 끝에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씨는 제대 후 10년 가까이 변변한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최씨는 “공사장에서 막일도 해보고, 이것저것 안해본 일이 없지만 ‘어차피 안되기 때문’에 포기해야만 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최씨는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배까지 북한에 빼앗겨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다”며 “그래도 어머니가 배는 절대로 못타게 했다, 아버지의 한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납북자 가족들은 가장이 납북되면서 가난이 대물림되고, 어머니들이 남편을 기다리지 못하고 재가를 하면서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1988년 충청도 장항의 수협에서 일하게 된 최씨가 본격적으로 납북자 관련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지난 1992년 김영삼 대통령이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으로 송환한 일이었다고 한다. 최 대표는 “장기수들은 소원대로 북한에 돌아가는데 우리는 북한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는 데 울분이 터졌다”며 “당시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판문점에 가서 ‘북한 당국은 강제 납북 인사 즉각 송환하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혼자 시위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최씨는 아버지의 북한 내 행적을 찾다가 지난 2000년에 결성한 납북자 가족 모임의 대표를 맡게 됐다고 한다. 최씨는 중국을 통해 이재근 진정팔 김병도씨 등 납북 어부들을 중국을 통해 귀환시키기도 했다. 그는 “귀환자들 탈출시켰을 때 아버지 탈출시키는 것 처럼 기분이 좋았다”며 “앞으로도 귀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재근씨 이후 정부가 납북자 국군 포로 말할 나위도 없고 납북자 탈출 시 현지에서 바로 인수를 받게 된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최씨는 지난 2003년 6월에 한국전쟁 당시 납북자 8만여명의 인적 사항이 담긴 CD롬과 전후 피랍자 486명의 명단을 들고 미국 뉴욕의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찾아가기도 했다. 당시 그는 북한대표부 입구에서 이틀동안 기다렸지만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가까스로 연결된 북한대표부 관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대표부측이 ‘한국인을 납치한 사실이 없다’고 하길래 피랍자 명단을 받으라고 했더니 ‘받을 필요가 없다고’ 대꾸했다”며 “계속 말로 다투다가 직접 만나려고 대표부 입구에서 이틀동안 기다렸지만 비행기 일정 탓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최씨는 아버지의 생사확인과 관련, “지난 2002년에 열린 4차 이산가족 상봉 때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금강산을 방문했지만 ‘생사여부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만 받고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듬해인 2003년 9월에 금강산에 가서 아버지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지금 94세의 나이로 북한에 생존해 있을 확률은 거의 없지만 언제 어떻게 사망했다는 공식 발표를 들어야만 인정을 하겠다”며 “한국 정부와 북한 정부가 사망한 납북자들의 명단을 공동 발표를 해야만 납북자 문제가 풀린다”고 말했다.

그동안 납북자 운동을 한답시고 서울과 중국 등을 오가면서 집을 비우는 일이 허다했다는 그는 “가족들과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이것이라도 남겨드린 것 같아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어 “인권위의 권고는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라며 “인권위 발표를 토대로 납북자 가족과 귀환자에 대한 특별법 제정에 열중하면서 납북자 생사확인은 물론 송환에 더욱 힘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재은 기자 2ruth@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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