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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가족’ 누명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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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511회 작성일 04-10-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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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가족들은 그동안 ‘빨갱이 가족’이라며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살아왔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간첩 사건만 터지면 붙들려가 ‘아버지한테 무슨 연락 없었느냐’며 온갖 고초를 당해야 했죠.”

납북자가족모임(이하 가족모임) 대표 최성용씨(52). 지난달 29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납북자 가족 486명에 대한 인권침해와 관련, 실태 파악과 진상규명을 통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필요하다”며 국회와 정부에 특별법 제정을 권고한다고 발표했을 때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37년 동안 남편을 기다리다 이제는 노환으로 거동조차 힘드신 팔순 노모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어머니와 비슷한 처지에 계신 할머니들이 가족모임에 많이 있습니다. 먼저 그 분들에게 전화를 드렸지요. 할머니들이 전화기 너머에서 흐느끼시는 목소리를 듣고 또 눈물을 흘렸지요.”

그가 납북자 귀환운동에 뛰어든 것은 1992년. 처음엔 납북된 아버지 최원모씨(납북당시 57세)의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어 혼자 시작한 일이었다. 92년 김영삼 정권 때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씨를 북으로 송환했다. 그는 “이인모씨도 가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느냐”며 이인모씨의 송환길인 임진각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현수막을 걸어놓고 시위를 했다.

그는 “아버지가 납북될 당시 나는 15살 소년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가장 필요할 때였다. 무작정 이 일에 뛰어든 것은 아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채워지지 않은 부정(父情) 때문이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어머니와 형에게 들었다. 아버지 최씨는 광복 이후 평북 정주에서 치안대장을 지냈으며 전쟁 통에는 켈로부대 소속으로 유격대 활동을 했다. ‘북진호’ 함장을 맡아 백령도에 포로를 실어다 놓고 군수물자를 받아 평북 일대에 보급하는 일도 했다.

“그게 결국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못한 이유가 됐습니다. 1967년 아버지가 선주인 ‘풍복호’가 납치되었는데 아버지를 포함해 두 분만 돌아오지 못하셨지요.”

그는 북한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중국을 드나들며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나 혼자의 일이 아니다”고 생각한 그는 조직적인 귀환운동을 하기 위해 풍비박산난 납북자가족들을 모두 모았다. 2000년 납북자가족모임을 만들었고 그 해 10월 대표를 맡았다.

2002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에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인권침해 진정을 했다. 지난해 말에는 남편을 빼앗긴 가족모임 소속 할머니들과 인권위에서 5일간 점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납북자 소식을 전해줄 사람들을 많이 접촉했다. 처음엔 한두번 브로커들한테 속기도 했지만 그 때 맺어놓은 중국내 인맥이 지금은 납북자 귀환운동의 ‘최일선 조직원’이 됐다. 최씨는 그 ‘조직’을 통해 2000년부터 지금까지 납북자 4명, 납북자 가족 2명, 국군포로 2명(그 중 백종규씨 유골이 지난달 30일 돌아왔다)을 고국에 데리고 왔다.

그는 “납북자는 90% 이상이 어민들이지만 다른 일을 하시던 분들도 많아 소관부처도 각각 다르다”며 “5월초에 가족모임 회의를 열어 국회와 정부를 찾아다니며 통일된 심의기구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윤성노기자 ysn0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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