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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씨 납북된 78년 선유도에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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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184회 작성일 06-04-1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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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서형식.장대석] '28년 전 선유도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납북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이 1978년 8월 전북 군산시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납치된 김영남(당시 16세)씨로 확인되면서 그의 납북 경위 등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시 김씨와 함께 해수욕장에 갔던 친구.선배와 가족, 수사를 맡았던 경찰관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날 벌어졌던 상황을 재구성했다.

군산기계공고 1학년인 김영남군은 여름방학을 맞아 '2박3일간 선유도에 피서 다녀오겠다'며 8월 5일 낮 12시쯤 집을 나섰다. 큰형수 김옥자(55)씨는 "새로 산 수영복과 쌀.반찬 등을 챙겨 주고 2000원을 줘 보냈다"고 기억했다.

함께 놀러 갔던 사람은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두 명과 동네 선배 세 명, 장갑 공장에 다니던 여자친구 세 명 등 모두 아홉 명. 이들은 군산시 해망동 여객터미널에서 오후 2시 여객선을 탔고 3시간30분 뒤 28㎞가량 떨어진 선유도에 도착했다.

이들은 해수욕장 근처 망주봉 아래에 텐트 세 개를 치고 놀았으나 저녁식사 후 선후배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오후 8시쯤 영남군 혼자 어둠이 깔린 바닷가로 나갔다.

동네 선배 최모(51)씨는 "티셔츠와 반바지, 슬리퍼 차림으로 나간 영남이가 한참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모두 걱정했다"고 말했다. 오후 9시쯤부터 친구와 선배들은 해변과 야산을 뒤졌으나 영남군을 찾지 못했다. 오후 10시쯤에는 파출소에 실종사실을 신고했으며, 경찰은 확성기를 통해 '김영남 학생을 찾는다'고 방송했다. 이후 나흘 동안 경찰관과 주민까지 나서 수색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남군 가족은 닷새 후인 10일 실종 사실을 알게 됐다. 혼날 것을 두려워한 친구들이 영남군의 행방불명 사실을 며칠 동안 숨겼기 때문이다. 가족은 영남이가 살해된 뒤 암매장됐을 수도 있다며 포클레인 등으로 야산.백사장을 파 보는 등 온 섬을 뒤졌으나 발견되지 않자 익사한 것으로 판단, 무당을 불러 넋을 달래는 굿을 하고 옷.사진 등을 불태웠다.

하지만 2년여 뒤 북한의 대남방송을 통해 생존 사실이 확인됐다. 당시 군산경찰서에 근무하며 수사에 참여했던 김모(67)씨는 "김씨가 혼자 백사장을 배회하던 중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끌려간 것으로 결론내렸었다"고 회고했다.

◆ 왜 학생을 납치했을까=대공 업무를 맡았던 경찰관들은 "북한은 남파 간첩 등을 교육하는 교관으로 육성하기 위해 나이 어린 학생을 많이 노렸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성세대보다 자본주의의 물이 덜 들고 단순해 북한사상을 주입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 전직 경찰관은 "70년대만 해도 남한이 경제적으로 힘든 때여서 청소년을 납치한 뒤 풍요롭게 대접하면 북한에 잘 적응한다는 말을 검거 간첩들에게 들었다"며 "서해안에서 납치가 잦았던 것은 섬이 많아 공작선 은폐 등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80년 4월 충남 서산 앞바다에서 붙잡힌 북한 공작선 선장은 군산은 물론 전남 서해안까지 20여 차례나 드나들며 납북자 물색 등 공작을 벌였던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실제로 김영남씨가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납치된 지 5일 뒤엔 전남 홍도 해수욕장에서 당시 천안농고 3학년이던 홍건표.이명우씨가 북으로 끌려갔다. 이에 앞서 77년 8월에는 홍도 해수욕장에서 경기도 평택시 태광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승민.이민교씨가 납북됐다.

군산.전주=서형식.장대석 기자 seo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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