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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납북자]“굿하고 제사까지 지냈는데 살아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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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289회 작성일 06-05-0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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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섬 샅샅이 파헤쳐… “북한의 손녀 사진, 작은 딸 꼭 닮았어”

최근 일본인 납북자 요코다 메구미씨의 남편이 1970년대 서해안에서 납북된 김영남씨로 밝혀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1978년 8월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납북된 김영남씨(당시 17세)와 같은 ‘고교생 납북자’들은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이명우·홍건표씨(1978년 8월), 최승민·이민교씨(1977년 8월) 등 모두 4명에 이른다. ‘어느 날 사라진 아들’ 때문에 평생 절망 속에 살아온 납북자 가족은 사라진 아들이 북한에 납치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생살을 헤집는 고통을 겪어 왔다. 납북된 아들을 그리워하는 두 가족의 애절한 사연을 담는다.

“영남아, 엄마 왔다! 막둥아, 엄마가 왔다!” 팔순 노모가 임진강 너머 북녘 땅을 향해 목놓아 울부짖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씨의 남편으로 확인된 김영남(金英男·45)씨의 어머니 최계월(82)씨가 4월 12일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았다. 1977년 11월 15일 일본 니가타(新潟)에서 13살의 나이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된 메구미씨의 남편이 1978년 8월 전북 군산 선유도 해수욕장에서 납북된 김영남(당시 군산기계공고 1년 17세)씨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하루 만이었다.

전날 전북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작은 딸 영자(48)씨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최씨는 충격에 마음을 진정할 길 없는 데다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씨는 고령의 나이로 허리 통증과 관절염으로 한 발 한 발 떼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작은 딸 영자씨의 팔짱을 꼭 끼고 전망대를 향해 발걸음을 떼던 최씨는 “허리가 아파 걷기조차 힘들다”면서도 “가슴이 떨려요. 그래도 어여 올라가 아들을 불러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마침내 힘들게 망원경이 있는 곳에 오른 최씨는 굽은 허리를 더욱 굽혀 망원경을 통해 임진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봤다.

하지만 최씨는 “늙어선지 잘 안 보여요. 바로 저기 산다는데, 그냥 뿌옇네요”라며 말 없이 눈물을 훔쳤다. 작은 딸 영자씨가 “엄마, 저기 산대. 바로 저 너머 산대. 죽은 줄 알았던 엄마 아들이 바로 저기 산대”라고 말하며 최씨와 부둥켜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28년을 살아온 노모는 그제야 “아들아, 엄마가 왔다! 이눔아, 엄마가 왔다!”고 소리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념의 세월이 몸에 밴 듯 최씨는 이내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서 저를 이렇게 부르는 줄 알기나 허겄는가? 아무 소용 없제.”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해수욕 갔던 막둥이가 사라지자 김씨 가족은 막내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함께 놀러 갔던 친구들을 닦달하기도 하고, 경찰에 신고도 해봤지만 아들의 소식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혹시 살해 당하고 파묻힌 것이 아닌지 선유도를 비롯한 서해 섬들을 두더지처럼 파헤치고 다녔다. 없는 살림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30만원을 들여 포클레인까지 동원해 아들의 시신을 찾았다. 포클레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손톱이 빠지도록 파헤쳤지만 시신은커녕 신발 한 짝 찾을 수 없었다. 정부에선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 말 없고, 무당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만 했다.

“담배 심부름이니 온갖 심부름 다했던 막둥인데, 그 심정 오죽 했겄어요. (영남이가 없어진 지) 한 해 뒤가 환갑이었는데, 환갑상을 걷어차 버리는데 눈물이 나대.”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실종된 지 5년 만에 울화병으로 숨을 거뒀다.

“영감! 당신이 그렇게 예뻐하던 막둥이가 쩌~기 살아 있다고 허요. 결혼도 하고, 자슥도 뒀다고 허요. 어쩔티요? 잉?” 들을 사람도 없건만 최씨는 허공을 향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최씨의 주름진 눈가엔 눈물이 마를 새 없었다. “딸내미(메구미의 딸 김혜경양)를 봤더니 우리 작은 딸하고 똑같어. 빼다 박었어. 죽었다고만 하더니….”

최씨는 기쁨과 한(恨)이 뒤범벅된,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지 못할 표정을 지었다. “무당 믿을 거 하나 못 돼! 그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헝게 물에서 넋 건지는 굿도 했제. 돈 많이 들었어. 영혼 결혼식도 시켜줬지. 신방까지 차려줬어.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최씨는 명절 때가 가장 싫었다고 했다. 자신보다 앞서 간 자식의 젯밥을 올려놓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 또래들을 보믄 그렇게 미울 수가 없대. 같이 놀러 가서 내 자슥은 죽었는데 저 놈들은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니 속이 미어지더라구.”

자식을 잃은 슬픔에 겹쳐 김씨 가족은 정부로부터 ‘간첩 가족’이라는 누명까지 써야 했다. 이사를 가도 정보 당국자가 따라 붙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아들의 소식을 물었고, 나타나면 바로 신고해야 한다는 둥 죄인 취급을 했다. 주변 사람들도 괜한 불똥이 튈까 김씨 가족을 멀리 했고, 계 모임조차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정부를 원망할 법도 하련만 북한에 있는 아들에게 해가 될까 최씨는 말을 아꼈다. “그래도 우리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한마디 하라”는 기자의 주문에 전망대를 내려오던 최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누굴 원망하겄어? 그저 대통령님, 북한과 잘 협조해서 우리 아들 빨리 만나게 도와주시오.” 북한에 바라는 바가 뭐냐고 묻자 “김정일이! 김정일 위원장! 우리 아들 빨리 보내줘라!”라며 다시 목을 놓았다.

이날 통일전망대를 찾기 전 김영남씨의 가족은 서울시 종로구 뉴라이트전국연합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로 김씨의 송환을 호소했다. 작은 딸 영자씨의 부축을 받으며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최씨는 DNA 검사 결과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무슨 말을 허겄어요? 그냥 보고 싶어요. 한 번만 보게 해주면 감사합니다. 제일로 보고 싶어요”라며 ‘보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들을 만나면 가장 해주고 싶은 게 뭐냔 질문에 최씨는 “계란을 삶아주고 싶다”고 했다. “영남이는 계란 프라이를 참 좋아했는데 그땐 계란이 귀해서 많이 못 해준 게 진짜 가슴에 맺힌다”며 “영남아, 너 좋아하는 계란, 그땐 못 해줬지만 니가 삶아 달라고만 하믄 몇 판이라도 삶아줄랑께 얼렁 와라!”고 말했다.

최씨는 ‘같이 살고 싶냐’는 기자들의 우문(愚問)에 “그럼요, 같이 살고 싶어요. 북한에서 보내만 주면 같이 살고 싶어요. 같이 살게 해주세요”라며 두 손 모아 막내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호소했다.

동생이 납북됐다는 사실 때문에 자식에게까지 연좌제의 폐해가 끼칠 것을 염려해 언론에 공개되기를 꺼렸던 작은 누나 영자씨도 이날은 언론의 사진 촬영을 허용했다. “이제까지는 우리 자식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돼 언론에 공개되기를 꺼렸지만 이젠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가 생겼다”며 “북한에 있는 영남이가 엄마와 내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를 눈물과 하소연으로 마무리한 김영남씨의 가족은 이틀 후 또 다른 충격을 겪어야만 했다. 4월 14일 김씨를 납치한 북한 대남공작원 김광현(金光賢ㆍ68)씨가 1980년 서해 서산 앞바다에서 체포된 후 전향해 서울에 살고 있다는 조선일보의 보도 때문이다. 신문을 본 김씨의 누나 영자씨는 한동안 말을 잃고 김광현씨의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사람이 죽은 줄만 알았어요.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내 동생은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북한으로 끌려갔을 텐데, 자기는 여기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영자씨는 지난 28년간 동생과 가족이 겪은 시련과 아픔이 떠오르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까…. 겁에 질렸을 동생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다인가요? 자신도 대학생 아들이 있다는데, 똑같이 자기 아들이 납치돼 생사도 모른 채 2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면…. 그 심정 알기나 할까요?”

영자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 어린 동생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온 가족의 인생을 망쳐놓고서 세상에…. 우리 영남이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 사람도 북에서 시킨 일이겠지만…. 누군 잘 살고, 누군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고…. 정말 우리 정부가 야속하네요.”

전날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崔成龍·54) 대표로부터 김영남씨가 북한 당국에 의해 가택 연금됐다는 소식을 들은 영자씨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대체 우리 영남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만 하나요? 어린 나이에 납치돼 겪었을 시련도 모자라, 또 다시 감금되는 수난을 겪어야 하나요?”

영자씨는 아직 동생의 가택 연금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28년 동안 가슴을 쥐어뜯어온 어머니는 이제 더 아플 만한 기력도 없어요. 어머니가 영남이가 감금됐다는 소식을 듣고 쇼크 받고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영자씨는 “내 동생이 다시 정상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제자리로 돌려놓아주세요”라며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DNA 검사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동생의 안전을 반드시 보장해주어야 한다”며 울먹였다. 인터뷰 내내 눈물을 흘리던 영자씨는 “6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어머니와 제가 동행해서 그곳에서 동생을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요? 마지막으로 동생 얼굴이라도 보고 잘 살고 있는지 확인하게 해주세요”라며 눈물을 닦아냈다. 영자씨는 “DNA 검사 결과가 나오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우리 정부와 온 세계가 다 우리 동생이 무사히 송환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간청했다.

김영남씨의 가족은 4월 18일 국회 ‘국무총리(한명숙) 임명동의에 관한 인사청문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어머니 최씨와 누나 영자씨는 정치인과 기자들의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제껏 생사 확인이나 송환 요청에도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정치권과 언론이 새삼 호들갑을 떠는 것이 짜증날 법도 했다.

4월 2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영자씨는 “어머니께서 청문회에 출석하신 후 더 많이 아프세요. 오늘 통일부에서 전화가 왔어요. DNA 검사를 하자고요. 일본의 DNA 검사를 요청받기 전에 우리 정부에도 요청했었는데 그땐 가만 있더니 이제와 그러네요. 정부에서 하자니까 해야겠지만 이젠 솔직히 좀 짜증나네요”라고 말했다. 영자씨는 “누군가는 일본이 영남이 문제에 열광하는 게 독도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냐고 묻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정치 같은 건 잘 몰라요. 우리 가족이 바라는 건 그저 우리 영남이가 안전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뿐이에요. 우리 가족의 바람이 무리한 건가요?”라고 되물었다.

일본의 DNA 검사 결과 발표와 독도 영유권 주장은 그 발표 시점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인권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우리 정부의 대 전제였다. 앞으로 정부가 얼마나 슬기롭게 이 문제를 푸는지 지켜볼 일이다.

안준호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l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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